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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성서학

우리가 몰랐던 1세기 교회 (박영호 지음, IVP 펴냄)

by 서음인 2023. 12. 7.

서론     
 
이 책은 1 세기 중반 바울이 편지를 쓰던 당시 수신자였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의 사회적 삶의 자리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다. 이 시도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잘못된 성경읽기 습관 때문이다. ① 현대 상황과 동일시 - 여성의 지위, 노예의 의미, 초대‘교회’의 정체에 관한 논의에서 현대와 1세기의 ‘거리’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② 관념에 갇힌 역사 - 신학이나 관념이 교회의 신학과 형태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 삶의 정황이 교회의 직제, 문화, 예배 형태, 교리적 표현에 영향을 끼쳤다. ③ 사회사와 문화인류학 - 정치사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아래로부터의 시각과 다른 문화로부터의 이해가 필요하다. ④ 자료의 문제 - 동시대 최상위 엘리트들이 남긴 문헌은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서민들의 삶을 직접 보여주는 자료와 비문헌 자료, 고고학적 자료들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1장 초대교회 교인들의 사회적 계층     
 
① 아돌프 디아스만으로 대표되는 ‘옛 합의’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는 빈민들의 운동이었다. 성서의 언어는 속인들의 언어인 코이네 헬라어이며 바울서신의 헬라어 역시 동시대 최고 지성인의 수준이 아니다. ② ‘새로운 합의’에 속하는 저지, 게르트 타이센, 에이브라함 말허비, 웨인 믹스등의 체계적인 연구에 따르면 초대교회는 사회의 최상층과 최하층을 제외한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다. 타이센은 이들의 주도적 사회원리가 “사랑의 가부장제”였다고 주장했다. ③ 저스틴 메깃은 바울을 포함한 교회의 구성원들은 물질적 결핍의 압박을 상시적으로 경험했던 99%의 가난한 계층이었으며, 모두가 부족한 중에도 서로 돕고 나누는 “경제적 상호부조정신”이 바울의 주도적 사회윤리였다고 주장했다. 프리젠과 롱겐네커는 더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생계유지선을 겨우 유지하는 수준 이하인 ES5-7에 속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2장 초대교회와 콜레기아       
 
초대교회의 모습을 잘 알기 위해서는 교회를 동시대의 유사한 사회조직들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콜레기아’는 주로 직능조합과 향우회의 성격을 띠었고 서로 단합해 경제적 이익을 보호했으며 정치적 압력단체나 상조회 역할을 하기도 했다. 보통 20-40명 규모로 한 달에 한 번 모였으며 임원을 선출하고 정기회비나 벌금을 부과했다. 두 조직 사이에는 규모나 조직 운용 면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차이점이 더 많다. ① ‘에클레시아’는 조합의 명칭으로 사용된 예가 없다. ② 교회는 경제적 인종적 차이를 넘어서는 다양한 사회계층으로 이루어졌다. ③ 주요 후원자에게 특별한 지위나 호칭을 수여한 흔적이 없다. ④ 강제적 회비가 아닌 자발적 선의와 나눔의 정신으로 유지되었다. ⑤ 매주, 심지어 매일 모이기도 했다. ⑥ 강한 윤리적 가치 지향을 공유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공동체였다. ⑦ 처음부터 세계를 품은 초지역적 네트워크였다. ⑧ 세속사회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을 중요시했다.
 
3장 초대교회와 오이코스     
 
(1) 초대교회는 3세기 이전에는 예배를 위한 건물 없이 가정에 모였으며, 가정교회가 성경적 교회의 표본이라는 ‘가정교회론’이 존재한다. (2) 그러나 이 주장은 역사적 증거의 지지를 받기 힘들다. ① 당시의 가정은 10평 남짓한 협소한 공간이어서 예배를 위한 충분한 공간을 제공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허술한 칸막이를 잠시 치웠다던가(주잇), 공장이나 창고 가게같은 상업적 공간을 사용했다(에덤스)는 가정들이 나왔다. ② 바울 당시의 집은 아내, 자녀, 노예들에게 억압적인 공간이었다. ③ 고린도교회가 현대 가정교회 모델과 가장 유사하나 가옥의  구조상 예배와 성찬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재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 따라서 ‘가정 같은 교회’는 1세기 교회와 어울리지 않는다. 바울은 ‘집’을 ‘교회’라는 공간으로 해석해 모임시에는 집에서도 교회처럼 행동하라고 가르쳤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물리적 공간인 '집'을 떠날 필요는 없었지만, 억압과 착취의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집'은 떠나야 했다. 
 
4장 초대교회와 철학 학파     
 
초기 바울 교회들은 철학 학파와 유사성이 있다. ① 녹에 따르면 다신론 사회였던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개종(oonversion)이란 종교가 아닌 철학 학파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② 창시자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동력으로 하여 그의 말과 삶을 전수해가며 유지되었다. ③ 로마의 종교는 바른 의례(orthopraxis)의 종교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이성적 능력인 바른 생각(orthodoxy)을 강조했다. ④ 영적 성장을 위한 바울의 권면에는 철학의 사이카고지(psychagogy, 영적 성장의 기술)과 비견할 면이 많으며, 회의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는 태도 역시 그리스 철학정신의 원류와 닿아 있다. ⑤ 바울은 철학자들의 문답법인 디아트레베를 사용했고(불트만), 바울서신의 윤리적 권면은 헬레니즘 철학자들의 권면과 비슷하며, 신약 저자들은 철학자들이 애용했던 양육법을 공유한다. (말허비) ⑥ 초대교회는 헬라적 유대교의 지적 전통도 이어받았다. 예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분별력과 합리적 사고를 요구받는 일이었다.
 
5장 초대교회와 회당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기독교는 2세기 초반에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으나, 그 후로도 교회는 수백 년간 회당과 물리적, 사상적, 문화적으로 지근거리에서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며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왔다. ① 회당이 (준)공공건물 형태였다면 교회는 개인주택에서 모였다. ② 정교하고 안정된 조직을 갖췄던 회당과 달리 교회는 훨씬 단순했고 서서히 조직을 발전시켜 갔다. 바울이 회당과 강한 긴장관계에 있었던 반면 야고보는 유대 전통에 우호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③ 회당은 대개 유력한 후원자와 그들을 예우하는 문화가 있었으나 교회는 재정 기부자를 특별히 예우하지 않았다. ④ 회당은 세속 정부의 양해 아래 준사법권까지 양도받은 자치조직이었지만, 바울은 시민 사회 조직보다 상위에 자신들의 에클레시아를 위치시켰다. ⑤ 회당과 교회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초지역적 네트워크였다. ⑥ 유대인과 이방인간에 차별이 존재했던 회당과 달리 교회는 하나되는 공동체를 지향했다.
 
6장 초대교회의 제도적 다양성      
 
마케도니아 지역에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와 빌립보 교회는 생계유지선 근처 혹은 이하의 사람들이 경제적 공동생활을 하거나 상부상조하던 가난한 교회였다. 이들은 자발적 조합인 ‘콜레기아’와 유사했으며 자급자족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과 공동체의 필요를 섬기는 일꾼들인 감독들과 집사들이 필요했다. 이들에게 형제 사랑이란 실질적인 물질적 나눔을 의미했으며,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에도 적극 참여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재정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비량으로 사역한 것을 자랑했다. 반면 고린도 교회는 부유한 가부장들이 개인 주택을 예배장소로 제공했을 뿐 아니라 행정력과 가르침까지 공급했던 교회였다. 따라서 ‘오이코스’를 모태로 형성된 가정교회의 형태를 띠었으며 따로 구별된 직분자나 리더십 구조가 필요하지 않았다. 바울은 유력한 교인들에게 개인적으로 돈을 받았을 경우에 생길 부작용을 염려해 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지만, 교회의 구체적 조직양태는 지역의 상황에 맞도록 꾸리도록 했다.
 
7장 빌립보 선교의 사회 경제적 맥락 (사도행전 16장)
 
① ‘로마의 식민지’인 빌립보는 로마의 퇴역군인들이 이주해 세운 로마의 축소판 같은 특권도시였다. ② ‘문밖 강가의 기도처’ 는 문(pomerium, 군대나 이방신이 들어올 수 없는 중앙지역)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방 여인들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섬기는 작은 모임으로 해석할 수 있다. ③ 바울이 주저한 이유는 ‘점치는 여종(노예)들’에 대한 축귀가 로마제국의 근간인 가부장제를 흔드는 중대한 재산권 침해였기 때문이다. ④ ‘퀴리오스’는 주로 노예가 주인을 부르는 말이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로마 사회를 위협했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퀴리오스’로 부르며 황제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라, 노예를 재화로 보는 제국의 에토스에 균열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⑤ 가부장 사회에서 회심은 대부분 집단적이었고, 사도행전은 기독교 선교운동을 가정이라는 사회의 기본 단위를 존중하는 운동으로 묘사하려 한다. ⑥ 지진으로 인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음에도 간수가 자결하려 했던 이유는 심리적 공황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은 로마의 체제를 일부러 흔들려 하지 않았지만, 그가 전한 복음에 담긴 하나님은 언제든지 로마 세계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분이었다.
 
8장 1세기 회당과 교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신구약성경은 압도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파격적인 평등과 해방을 지향하는 문서였다. 구약성경은 남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여성의 리더십을 큰 폭으로 인정하며, 신약성경 역시 당시의 윤리적 코드에 일부 적응하는 본문이 나오지만 남성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놀라운 성평등을 지향한다. 그레코 로만 사회에서 남녀의 공간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으며, 대체로 로마문화보다 그리스 문화가 여성에 대해 좀 더 보수적이었다. 유대는 범주적으로 그리스 문화권에 속한 하위 문화권이었으며,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여성들이 리더십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공동식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문제되었다. 바울은 여성들이 머리에 두건을 쓰라고 말함으로서 보수적인 그리스 문화 편에 서기도 했지만, 성차별뿐 아니라 모든 차별과 문화적 장벽을 넘어서려고 애썼다. 여성들이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은 여성들이 이미 활발하게 리더십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속도 조절을 주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9장 초기 기독교와 노예 제도
 
그레코-로만 사회의 노예제는 열린 시스템이었다. 그들은 사회적 죽음 상태였지만 군인을 제외한 모든 직종에 열려있었다. 자유인, 해방노예, 노예는 서로 간에 계급적 상하관계가 아니었으며 실제로는 그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가 훨씬 중요했다. 노예들은 주인을 법정 대리인으로 세우고 사업을 하거나 사유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축적한 재산으로 자유를 구입해 투표권을 가진 시민이 될 수도 있었다. 가이사보다 더 높으신 분인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말은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 아닐 수 있으며, ‘속량’이란 잔혹한 죄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노예로 바뀌는 것을 의미했다. 스데반을 포함한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 해방노예들이 초기 기독교 형성에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인(아리스토텔레스)은 노예를 ‘말하는 도구’로 보았지만 로마인(세네카)는 노예됨을 불운의 결과로 이해했다. 바울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은 노예제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지만, 노예제와 복음은 조화될 수 없다는 진리의 핵심에 가 닿았음이 분명하다.
 
10장 초기 그리스도인의 교육 수준
 
고대사회의 문해력은 10%미만이었다. 로마의 귀족들은 아들을 직접 교육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으나 공화정 말기부터는 그리스의 영향으로 학교교육을 확립해 갔다.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2년 정도의 초등교육을 마치면 짧은 편지를 쓰거나 계약서를 읽을 수 있었고, 중등교육에서는 호머의 시들이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12-15세부터 4년간 지속되는 고등교육 동안에는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하는 데 치중했다. 바울은 어느 정도의 수사학적 기교를 구사했지만, 그의 글은 고등교육을 성공적으로 마친 최고 엘리트의 수준은 아니었다. 예수는 히브리어를 읽고 쓸 수 있었지만 서기관급 문해력을 갖추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편지를 낭독하는 것이 1세기 예배의 주요 요소였으며 이는 청중인 성도들에게 정교한 언술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합리적 사고력을 요구했다. 3-4세기에 이르러서는 수사학적 철학적으로 필론을 능가하는 교부들이 등장했으며, 이러한 지적 노력이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그들은 문자를 통해 신앙을 전달했지만, 문자로 전달하는 지식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기도 했다.
 
11장 그들은 어떻게 예배했을까
 
바울이 사역했던 AD40-50년경 예배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인 고린도전서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① 회중의 참여와 하나됨이 강조되었고, ② 예루살렘 성전예배를 모범으로 삼되 거리를 두기도 했으며 ③ 엄격한 일신교적 원리를 따라 이방 제사와 관련된 모든 행위가 금지되었다. 기독교 예배의 특징은 ① 당시 대부분의 종교와 달리 희생제사가 없었다. ② ‘심포지엄’과 비슷했으나 좁은 공간에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섞여 예배하고 식사하는 불편한 자리였다. ③ 이는 사회이념이 아닌 신학과 믿음에 기반한 ‘평등’의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④ 믿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예배의 핵심이었으며 이를 위해 사도의 가르침을 듣거나 바울의 편지를 낭독했다. 이를 영적(합리적) 예배라고 불렀다. ⑤ “거룩한 입맞춤” “예배에 부적당한 자의 배제” “마라나타” “축도”를 포함하는 일정한 형식을 갖췄다. ⑥ 바울서신에서는 예전으로서의 세례와 성찬이 절대화하지 않는다. 성전파괴후 성전 제사를 대체할 새로운 예전이 필요해지면서 세례와 성찬이 강조된 마가복음이나 디다케가 출현했다.
 
12장 그리스도인들은 왜 핍박을 받았을까?
 
기독교 전파 초기에는 정권 차원의 조직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는 없었으며, 박해는 주로 국가(정치, 위)가 아닌 동료 시민들(사회, 옆)로부터 왔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다신교 사회로 속주의 문화와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으나 황제숭배를 포함해 로마의 신들에 대한 제사(경건, pietas)는 로마 시민의 의무이자 국가에 대한 충성의 표시였다. 따라서 로마의 수호신들에 대한 경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 즉 신들과의 평화(pax deorum)를 깨뜨려 사회에 불행을 불러오는 위협요소로 여겨졌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회심하면 우상을 치우고 윤리적 삶을 살아갔으며 이러한 행태는 그들을 사회적 소외와 경제적 궁핍으로 몰아넣었다. 계시록 독자들은 겪은 상황이 바로 이것이었다. 박해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했으나 일부는 죽음을 불사하는 완고한 충성을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고집은 제국의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부록 성경해석과 사회사
 
일반 역사에서 사회사가 정치사와 대척점에 있다면 성경 해석 분야에서는 신학 중심의 성경읽기에 대한 반성을 포함한다. 우리는 물리적 세계가 아난 사회적 합의로 구성된 세계에서 살아가기에 사회적 실체로서의 교회를 도외시한 채로는 교회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사회학적 방법론과 모델을 성경연구에 사용할 때는 과도한 일반화와 환원주의를 경계하면서 본문과 역사적 자료가 침묵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발견의 도구로 사용되는 선에서 활용해야 한다. ① 바울신학의 새 관점학파에 속하는 제임스 던은 바울신학의 주요 과제가 ‘이신칭의’라는 구원론이 아니라 ‘정체성 표지’라는 사회적 문제였다고 주장한다. ② 문화인류학적 접근이나 문화기술적 연구는 자신의 전통을 상대화하며 서구 중심적 시각을 교정할 수 있게 해준다. ③ 사회사적 성경해석은 남성 주도의 텍스트와 해석의 문화를 상대화하여 여성 입장에서 성경을 볼 수 있게 도와준다. ④ 사회사는 정치사가 관심 갖는 역사적 격변이 아니라 일상의 영성을 배양하기 위한 신학적 자원을 제공한다. ⑤ 사회사적 연구는 크리스텐덤 기간 동안 왜곡된 신학적 구도를 기독교 세계 이전의 비주류적 관점으로 되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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