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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성서학

정말 야훼가 다 죽이라고 명령했을까? (곽건용 지음, 꽃자리 펴냄)

by 서음인 2024. 1. 6.

구약성서의 내용 중 현대인들에게 가장 당혹스러운 부분 중 하나는 야훼 하나님이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이라고 명령한 소위 ‘헤렘’일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룩한 하나님이 명령했기에 대량학살이든 인종청소든 모두 정당하다는 근본주의의 입장에서부터 헤렘은 실제로는 학살명령이 아니라 죄의 유혹과의 싸움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알레고리적 해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명이 존재해 왔으며, 이는 ‘헤렘’ 명령에 대해 사람들이 느껴 왔던 당혹감을 잘 설명해 줍니다. 『정말 야훼가 다 죽이라고 명령했을까』는 고등학교 시절 잠시 전도사와 학생으로 인연을 맺었고 제 책 『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의 추천사를 써주시기도 했던 LA 향린교회의 곽건용 목사님이 구약성서에서 헤렘을 다룬 본문들을 살피면서 이 난해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계시’와 ‘역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알아야 합니다. 저자는 ‘계시’에는 하나님의 뜻 뿐 아니라 그 뜻에 대한 사람의 해설과 반응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일방적으로 전달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결과로 탄생한 ‘공동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저자는 이를 ‘참여적 계시’라고 부릅니다. 또한 저자는 헤렘 명령이 등장하는 구약성서의 가나안 정복 이야기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가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의 원인이 전지전능한 야훼이며 역사는 이 야훼가 자신의 뜻을 알리려고 사용하는 매체이자 그 뜻을 이루는 장이라는 전제하에 쓰인 ‘역사화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런 일들이 실제 일어났는지 여부에 집착하기보다 이스라엘이 그 사건을 통해 어떤 야훼의 메시지를 전해 받았는지 찾아야 합니다.
 
저자는 헤렘을 규정하는 두 가지 원칙이 ‘배타성’과 ‘완결성’이며, 그 중 우선은 배타성이라고 주장합니다. 헤렘 이야기의 핵심에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배타적 언약관계를 보호하기 위한 ‘언약신학’이 있으며, 모든 생명체를 완전히 죽이라는 ‘헤렘신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 배타적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헤렘명령이 어떠한 예외도 없이 항상 문자 그대로 완벽하게 실행되어야 할 신학적 실천적 원칙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실제로 가나안 전쟁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이 헤렘을 명령받았던 경우에도 완전한 형태로 헤렘이 행해진 적은 없었습니다. 여리고 성에서는 라합이, 아이 성에서는 전리품이 헤렘에서 제외되었으며, 기브온 사람들 역시 헤렘 명령의 예외로 남았습니다. 또한 저자는 헤렘 명령이 언약법전에 속해 있고 조건절 없는 정언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명령이 어떤 처벌을 가할지에 대한 구체적 처벌규정이 아니라 일반적인 도덕적, 신학적 원칙의 천명일 것이라고 결론내립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저자는 정복전쟁과 헤렘의 이야기는 벌어진 사건을 일어난 그대로 전하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 서술이 아니고,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되 후대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기 위해 서술된 ‘판타지’라는 문학장르에 속한다고 결론내립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이야기들은 BC 7세기 요시야 왕 시대에 종교개혁이 단행되면서, 혹은 유다의 망국 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후 만들어졌습니다. 제국의 압제에 고통당하던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처한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찾다가 가나안 정복시대에 가나안 종족들의 유혹에 빠져 야훼를 떠나 배교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시기를 이겨내기 위한 ‘정신승리’의 방편으로 과거로 돌아가 가나안 종족들을 전부 멸절시켜 문제의 뿌리를 제거한다는 ‘헤렘’이라는 판타지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 사실 저자는 입증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헤렘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자는 가나안 정복 이야기 속에서 몇몇 가나안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은 헤렘 원칙의 예외가 아니라 헤렘이라는 판타지가 현실과 부딪혔을 때 입을 상처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기원전 1200년경에 야훼라는 신을 믿는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이 외부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 그곳에 살고 있던 일곱 종족과 싸워서 그 땅을 차지했지만, 고고학적 연구와 성서 내러티브를 살펴보면 실제로는 그 과정에서 가나안 종족이 멸절당하거나 완전히 쫒겨난 적은 없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요시아 종교개혁 시기나 포로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에게서 가나안 종족들을 헤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믿었고, 그들에게 헤렘 명령은 야훼가 자신의 뜻을 드러낸 계시였습니다. 그들은 이 명령을 실행함으로 둘 사이의 언약관계를 지키는 것이 야훼의 뜻이었다고 확신했으며, 이 명령을 잘못되었다고 여기지도 않았고 그런 명령을 내리는 야훼의 폭력성과 비윤리성을 비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계시가 하나님의 뜻과 그에 대한 인간의 해석과 반응이 섞여 있는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작품이기에 실제로 야훼가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성서의 헤렘 이야기에 함부로 현대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거나 명백한 증거 없이 성급하게 결론에 도달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성서 텍스트를 분석해 이 이야기의 장르가 무엇이고 당시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 설득력 있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헤렘은 하나님이 한 일이니 무조건 옳았다거나, 정복전쟁이 그때 옳았으니 지금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만들어가야 할 ‘참여적 계시’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고 강조합니다. 성서는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고정된 진리의 다발들’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야 할 ‘참여적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계시에 인간의 해석과 반응이 포함되어 있다거나, 성서에 나오는 헤렘을 ‘판타지’라고 규정한 것에 불편함을 느낄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는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전쟁과 폭력이 만연한 21세기의 세상에서 성서에 나오는 헤렘과 폭력에 대한 여러분의 '더 나은' 설명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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