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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조직교과서

요약중 -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스탠리 그랜츠 지음, 신원하 옮김, IVP 펴냄)

by 서음인 2020. 9. 9.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은 리젠트 대학의 조직신학과 기독교 윤리 교수였던 스탠리 그랜츠가 쓴 신학적 윤리학 교과서다. 저자는 오늘날의 인류가 근대 과학의 발전과 다원주의 사회의 도래를 포함한 몇 가지 이유로 인해 과거 세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복잡한 윤리적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윤리란 성경 이야기들을 통해 드러난 신학적인 시각을 이러한 문제들에 실제로 적용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이 현대의 윤리적 문제들을 직접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를 세우는 데 있다고 덧붙인다. 중요한 철학적 · 신학적 윤리학의 모델들을 소개한 후 저자의 주장이 전개되는 책의 내용을 요약하기로 한다.

 

 

1장 기독교 윤리학과 윤리적 과제

 


윤리적 과제


기독교적 관점에서 윤리학이란 성경과 기독교적 확신에 준하여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철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윤리학은 도덕 철학즉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생기는 다양한 종류의 문제를 숙고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이성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윤리적 삶의 개념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일반 윤리학의 범주

 

(1) 경험 윤리학은 사람들이 실제로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방식과 과정을 연구한다. (2) 규범 윤리학은 삶에 대한 표준 혹은 원리를 만드는 것과 관련되며, 무엇을 행해야 하며 무엇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이와 관련된 판단은 도덕적 의무의 판단 도덕적 가치의 판단 무도덕적 의무에 대한 판단 무도덕적 가치에 대한 판단으로 나뉜다. (3) 분석 윤리학은 도덕 자체의 성격을 탐구한다. 그것은 도덕과 무도덕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가치 판단을 내리는 기초를 형성하는지 탐구한다.

 

행동을 위한 규범 윤리학

 

많은 윤리학자는 윤리학을 행위의 표준을 도출해내는 시도로 이해한다. 그들의 윤리는 행위의 윤리다. 여기에는 의무론적 접근과 목적론적 접근이 있다.

 

의무론적 접근법은 어떤 행위의 도덕성은 행위자의 의도나 동기에 의존하지 않고, 각 행위의 본래적 성격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규칙 의무론'(rule deontologism) 개별 행위가 아닌 규칙이나 원리가 도덕적 행위의 옮고 그름을 결정하며, 윤리적 삶이란 규칙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규칙을 성경에서 찾으며, 철학적 윤리학자들은 그 규칙을 결정하는 원천으로 인간 이성을 천거한다. 이들은 다시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조셉 플레처의 사랑처럼 하나의 규칙이 윤리적 행위를 제어해야 한다는 원리 단일론십계명이나 산상수훈처럼 몇 가지 규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다원론적 의무론으로 나뉜다. 다원론적 의무론은 다시 근본적인 도덕적 의무들이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는 상충되지 않는 절대주의와 우선순위의 잣대로 중요성의 위계를 정하는 위계주의로 나뉜다.

 

목적론적 접근법은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낳는 결과나 유용성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며, 행위의 목적은 악에 대한 선의 우위를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윤리적 이기주의는 각 사람의 도덕적 의무란 자신에게 악에 대한 선의 우위가 최대가 되도록 행동함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쉽다는 점에서 기독교 정신과 상충된다. 공리주의는 행위를 한 당사자의 유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유익이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규칙 공리주의는 어떤 규칙이 최대한의 유익을 산출할 수 있는지 묻는다. 이 이론에는 개인을 위한 정의의 개념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가 지적된다.

 

윤리학과 가치 이론

 

이란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것이며, 두 가지 형태의 가치 이론이 있다. (1) 획득적 가치는 그 사물의 효과로 인해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를 말한다. (2) 내재적 가치는 사물의 가치의 근거가 효과가 아니라 그 자체의 본성에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여기에는 쾌락주의는 쾌락이 항상 그 자체로 선하며 고통은 항상 나쁘다고 주장한다. 관심 가치론은 우리가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기 실현이 내재적 선이라는 주장선한 삶이란 삶의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또다시 i) 우리의 존재 목적이 우리의 본질을 결정한다는 본질주의적의 관점과 ii) 근본적인 삶의 목적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실존주의적 관점, 그리고 iii) 지고의 선이란 이성에 따르는 덕스러운 삶이라고 주장하는 관점으로 나뉠 수 있다.

 

존재의 규범 윤리학

 

(1) 행위와 존재 - 윤리학의 초점이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닌 우리는 누구인가에 있다면, 우리는 행위에서 관심을 돌려 존재(성품과 덕)의 윤리를 고안해야 한다. 존재의 윤리는 가치의 판단에 우선순위를 두며, 도덕적 의무와 판단은 행위자의 동기, 성품, 덕에 대한 판단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 윤리학자들의 관심은 행위의 윤리에서 존재의 윤리로 눈에 띠게 전이되고 있다(2) 의무론적 접근과 목적론적 접근 - 존재의 윤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어떤 성품은 내재적으로 옳기에 의무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특질 의무론 악한 결과보다는 선한 결과를 낳는 성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특질 목적론 내 자신의 행복에 가장 도움이 되는 덕을 개발하라는 특질 이기주의 일반적 선을 증진시키는 덕을 개발하라는 특질 공리주의로 나뉜다(3) 규범 윤리학과 선의 추구 - 도덕의 궁극적 기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옳음에 초점을 맞추는 의무론적 이론은 윤리가 어떤 것이 내재적으로 옳다고 선언할 수 있는 모종의 권위에 의존해 있다고 생각한다. ‘선함에 초점을 맞추는 목적론적 이론에 따르면 윤리란 무도덕적 가치에 대한 결정에 의존하게 된다. 규범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선한 삶의 문제로 귀결되며, 이는 분석 윤리학으로 인도된다.

 

분석 윤리학

 

윤리적 판단의 기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세 가지의 답이 있다. (1) 자연주의는 보편적인 의무 원칙들이 인간의 정신과 우주의 본성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하며, 종종 자연법의 형태로 표현된다. 여기에는 선함과 옳음이 관찰할 수 있는 실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윤리적 자연주의와 선이란 장차 도달할 자신의 이상적 모습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는 목적론적 자연주의, 윤리적 진술은 자연적 세계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혹은 신학적 사실의 주장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도덕주의가 있다. 이 이론의 반대자들은 존재에서 당위를 추론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한다(자연주의적 오류). (2) 직관주의는 윤리적 진리란 다른 명제로부터 유추되는 연역적인 추론이 아니라 직접적인 직관(주로 직관적 이성)으로부터 알 수 있는 자증적 진리라고 말한다. (3) 비인지주의는 윤리적 판단이 인지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주로 감정이나 느낌이나 태도를 표현한다고 주장한다(이모티비즘). 그리고 모든 진술은 화자가 갖고 있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는 내재적인 명령을 통해 모종의 행동을 촉발시키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윤리학의 필요와 막다른 골목

 

윤리학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에 대한 일반 윤리학의 대답은 윤리적 삶이 선한 삶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사회를 유지시킴으로서 개인의 행복에 기여하기 때문에 가장 합리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성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일반 윤리학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인간의 영역으로 가둠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일반 윤리학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준거점을 바라보게 한다.



2장 헬라 윤리학 전통



헬라 윤리학 전통은 도덕 철학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서구 윤리의 전통에 형태를 부여하는 큰 틀을 제공했다.


# 헬라 윤리학 전통 

 

 

형이상학적 배경

인간의 본성

윤리의 유형

덕의 개념

플라톤

형상의 위계

이성 대 감성

질서있는 통합

네가지 덕, 정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상+질료

이성적 동물

행복

중용/순기능

에피쿠로스

쾌락주의

극히 물질적

마음의 평화

쾌락/고통/우정

스토아 철학

결정론

의지

자연에따른 삶

자기 통제

플로티누스

일자에게 회귀

소우주 영혼

신이 되어 감

시민적+고차

 


플라톤과 질서 있는 통합

 

① 플라톤에게 선이란 행복’의 상태였으며, 이는 개인에서든 집단적 삶에서든 각 부분이 전체에 기여함으로서 구현되는 질서 있는 통합을 통해 얻어진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과 감성으로 구성되며, 후자는 다시 영적인 부분(의지)과 감각적인 부분(육욕)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성에는 지혜’, 의지에는 용기’, 육욕에는 절제라는 덕목이 필요하며, 이 세 가지 덕은 통합적인 덕목인 정의를 요구한다. 사회에서 인간 영혼의 이성적/영적/감각적 부분에 해당하는 계층은 각각 입법자와 군인과 노동자들이며, 이들에게도 각각 지혜용기절제가 요구된다. 개인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선이란 각 계층과 그들의 덕목이 잘 어우러져 질서 있는 하나의 전체로 존재하는 상태이다. 플라톤의 선 이해는 실재가 가변적인 현상과 불변하는 이데아로 구성되며, 선이란 이데아의 세계에 속한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위계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데아들의 정점에는 선의 이데아가 있으며, 덕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는 선의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악이란 악한 의도에 의해 발생한다기보다 무지의 결과다.  


# 영혼/사회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


구분

능력

상응하는 덕목

담당 계층

이성적

이성

지혜

입법자

감성적

 

 

 

    영적

의지

용기

군인

    감각적

육욕

절제

노동자

 

 

정의(통합적 덕)

 

 

 

아리스토텔레스와 행복

 

사물은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지며, 형상은 구체적인 대상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도덕적 성찰 역시 선의 이데아에 대한 관조가 아니라 일상의 삶에 대한 관찰을 통해 발견될 수 있다. 사물을 규정하는 네 가지 원인은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 목적인이며, 그 중 목적인이 대상의 목적(telos), 또는 존재 이유를 결정한다. '이성적 동물'인 인간의 목적(telos)은 이성 혹은 합리성을 온전히 발휘하는 삶이며, ‘이란 인간의 존재목적을 실현케 하는 ’(탁월성)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의 상태이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적 측면과 비이성적 측면으로 나뉘며, 이들은 각각 지적인 덕도덕적인 덕과 연결되어 있다. ‘도덕적인 덕은 본성적이고 자연적인 영혼의 능력과 이성적 도덕 원리에 따르는 지속적인 행동이 축적되어 형성된 습관이며, 모자람과 지나침의 두 극단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그 핵심으로 한다. 인간은 공동체에서 살아갈 때에야 잠재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윤리적 삶은 사회적이다. 사회적 삶의 최고 표현인 국가의 목적은 구성원들이 행복하고 고귀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와 마음의 평화

 

①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유일한 선이고 고통은 유일한 악이며 덕이란 쾌락의 기술이라고 주장했던 ‘쾌락주의자’였다. 그러나 마음의 쾌락이 육신의 쾌락보다 더 중요하며, 적극적이고 감각적인 쾌락보다는 고통 없고 평온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② 신과 인간의 영혼을 포함한 모든 세상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기에, 인간사의 모든 현상은 신적 섭리나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물리적 관점에서 설명해야 한다. 신들은 인간사에 개입할 수 없으며 영혼 역시 죽음과 함께 소멸되기에, 인간은 다가올 죽음이나 사후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 필요가 없다. ③ 평온한 삶에 도달하기 위해 획득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은 세계의 질서나 이치에 대한 지식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신중함’이다. 또한 완벽한 삶의 정점은 자기의 유익 혹은 상호 이익에 기초하고 있는 철학적 형제애인 ‘우정’이다. ④ 결국 에피쿠로스의 윤리적 충고는 사랑에 빠지거나 가정을 이루거나 정치적인 삶을 사는 대신, 단순하고 소박한 삶에 만족함으로서 평온한 삶과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고 마음에 맞는 좋은 친구들과 함께 삶을 즐기는 ‘현자’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후대의 ‘에피쿠로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스토아주의자들과 체념적 자기통제

 

① 스토아 철학자들은 만물의 배후에 우주를 작동시키는 보편적 이성이 존재하며, 인간이 이성을 사용함으로서 우주의 이성적 원리를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선한 삶이란  신적 이성(혹은 섭리)과 연결되어 있는 자신의 이성이 지도하는 대로 우주의 원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것이다. ② 따라서 정론적인 세계에서 이성에 따라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통제 불가능한 바깥 세상에서보다 통제가 가능한 내적 자아 안에서 행복을 발견하며 만족하는 삶이다. '덕'은 이성을 통해 우리의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고 절제를 행사하는 것이며, 비이성적인 감정이나 욕망을 ‘체념’을 통해 다스림으로서 성취될 수 있다. ③ 보편적 이성이 통치하는 우주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우주의 시민’이며, '자연법'에 따라 공통적 시민의식이 요구하는 타인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스토아 철학은 선과 악에 대한 교대 헬라 철학의 강조에서 법 준수 및 의무를 강조하는 더욱 근대적인 윤리 개념으로의 전이를 잘 보여준다. ④  스토아주의자들은 초연한 자세로 세상의 악과 불공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러한 스토아주의는 변혁론자를 위한 윤리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플로티누스 그리고 신과의 합일

 

일자’(the One)는 우주의 최종적 토대이자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모든 실재는 일자로부터 나온 논리적 유출물이다. 첫 번째인 지성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유사하고, 두 번째인 영혼은 물리적 세계에 생명을 부여하는 삶의 원리라고 볼 수 있으며, 형상이 결여된 최초의 악인 질료(물질)‘가 마지막이다. 인간은 부분적으로는 영혼의 영역에 부분적으로는 질료의 영역에 속해 있는 복합체이다.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욕망하는 자이며, 그 진정한 욕망의 대상은 일자이다. 모든 창조계는 일자로부터 나와 일자를 향하는 순환 운동이며, 그 운동의 궁극적 단계는 일자와의 신비적이고 몰아적인 연합 상태인 무아지경(ecstasy)에 도달하는 것이다. 덕스러운 삶에는 두 종류가 있다. 지혜 · 용기 · 절제 · 정의와 같은 시민적 덕은 우리가 사회 속에서 선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반면, ‘더 고차원적인 덕은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일자와 합일해 신과 같이 되도록(divinization) 돕는다. 이러한 신플라톤주의는 물질적 영향을 경시하고 엄격한 금욕주의 경향을 가진 새로운 기독교적 신비주의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3. 성경의 윤리학


 

도덕적 삶과 히브리 성경

 

우리가 구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윤리라는 현대적 용어에 해당하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 이 장의 목표는 히브리 성경에 포함된 영속적인 행동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구약 성경 이야기의 핵심 주제를 요약하는 것이다.

 

기본 주제 : 언약 안의 하나님      히브리 성경 기자가 윤리적 삶에 관해 말하는 모든 내용의 토대가 되는 언약이라는 개념 안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 속에 있으며, 그 관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의 파트너가 된 이스라엘은 개인과 가정 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모든 차원에서 거룩한 무리가 되어야 했다. 언약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신 이야기에 구현된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으며, 율법은 이미 언약 관계 안에 있는 공동체가 은혜와 거룩에 머물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안내와 지침을 제공했다. 히브리인들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나 인본주의적 이상에서가 아니라, 언약의 역사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선의 개념을 이끌어냈다. 히브리인들이 보았던 하나님은 신실하고, 공의로우며, 사랑이셨고, 거룩했을 뿐 아니라 자비로웠다. 구약 기자들은 이 성품들을 묶어 하나님을 긍휼하신 분으로 묘사했으며, 이스라엘의 역사는 긍휼하신 언약 체결자의 결연한 신실함의 역사다.

 

보조 주제 - 개인의 죄/사회적 연대성/종말론적 전망      고대 이스라엘에게 죄는 단순히 하나의 법에 대한 규칙위반이 아니라, 언약 준수를 거부하거나 그것에서 의도적으로 이탈한 상태를 의미했다. 이러한 죄에 대한 가르침에는 삶의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구약에 나타나는 집합적 연대성’의 개념은 언약적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죄를 공동체의 차원에까지 확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집합적 연대성뿐 아니라 개인의 책임 역시 강조함으로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는 한 민족이 하나님께서 돌아설지라도 하나님이 그 백성 중에서 순종하는 소수를 보존하신다는 남은 자’ 사상과, 무죄한 개인의 자발적 고난이 민족 전체를 개심시킬 것이라는 '고난받는 종'에 대한 소망을 낳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의 오심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고대했으며, 이 약속이 당장 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언약 백성의 편에서 행하시기라는 종말론적 소망을 굳게 품었다.

 

예수님과 도덕적 삶

 

신약의 복음서 기자들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품었던 종말론적 소망에 응답하셨다고 선포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 기사는 성경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며, 성경 윤리의 핵심을 이룬다.

 

배경 :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예수님은 율법의 유효성 자체를 문제삼으신 것이 아니라, 경우론적 해석과 적용을 통해 율법의 요구에 응답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 위선을 공격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자가 아니라 자신을 낮춰 회개하는 자가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로 만족하시지 않고 행하는 사람의 인격적 중심을 중시하셨다. 예수님은 의롭게 되는 것이 공로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은 윤리적 삶이란 하나님의 법을 지켜 긍휼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여 나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윤리      (1) 하나님 나라의 윤리 - 예수님이 제시하신 윤리는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였으며, 이는 선한 삶의 본질이 행복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왕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사는 것이며, 이는 진심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라는 명령에 집약되어 있다. (2) 하나님의 가족을 위한 윤리 -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은 하나님의 가족에 참여한다는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르면 참된 삶의 기초는 예수님이 아바라 부르시는 분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야 하고, 서로 간에 가족적 연대성을 가진 공동체로 살아야 하며,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해야 함을 의미한다. (3) 본받음의 윤리 -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삶인 본받음의 윤리를 태동시킨다. 제자들은 사역을 통해 자신의 삶을 윤리적 모범으로 제시하신 주님을 닮아갈 뿐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성경 이야기의 내용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초대교회의 윤리 : 바울의 모범

 

바울의 윤리는 지극히 신학적일 뿐 아니라 지극히 구원론적이며, 지극히 기독론적이면서 지극히 성령론적이다. 이러한 바울의 윤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진정한 자신이 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바울의 윤리      (1) 구원 : 도덕적 삶의 기초 -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얻은 자들은 내주하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도덕적 힘을 경험하게 되며, 그들이 얻은 종말론적 구원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 그리스도를 닮음 : 도덕적 삶의 목적 - 바울에게 도덕적 삶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을 비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고, 지성의 영역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며, 성령의 열매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3) 영적 전투 : 도덕적 삶의 맥락 -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은 반드시 육체에 대한 성령의 싸움을 수반한다. 신자들은 인간의 연약하고 죄된 본성인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삶에서 벗어나,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형성된 새 실재를 입어야한다. (4) 사랑 : 도덕적 삶의 방식 - 바울은 율법이 아닌 성령만이 생명을 주며, 성령이 주시는 생명은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고 선언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자 모든 윤리의 중심이다. (5) 자기 수련 : 도덕적 삶에 이르는 수단 - 바울은 율법이 도덕적 삶을 창출한다는 생각에 반대했지만, 강요된 규율이라는 외적 강제를 높은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자발적인 자기 수련으로 대체했다. (6) 성령 : 도덕적 삶의 수행자 - 바울에게 기독교 윤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성령이야말로 의로운 삶의 수행자시다.   

 


4장 고전적 기독교 윤리학 모델


 

어거스틴 :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윤리

 

기독교 신플라톤주의자     어거스틴의 윤리사상은 철저히 기독교적이지만 신플라톤주의에 깊이 빚지고 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플로티누스의 실재의 위계에서 정점에 있는 유일자가 바로 지고선인 기독교의 하나님이며, 인간의 지고선은 이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헬라 철학자들은 지고선, 즉 마음의 탐구 대상을 정확히 지적했지만 그것을 얻는 데 필요한 힘의 근원을 밝히는 데 실패했다. 일자와의 몰아적인 연합은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를 이끌어주실 때 이루어지며, 계시는 이 의지적 힘의 원천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창조된 존재이기에 하나님을 만날 때만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윤리적 삶     악이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선한 것의 결핍이다. 인간에게는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할 능력도 결핍되어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문제는 인간의 의지 내에 존재하는 이러한 결핍 때문이다. 기독교 윤리의 핵심은 가장 중요한 덕이자 다른 모든 덕의 원천인 사랑이며,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둘 다를 의미한다. 윤리적 삶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하며,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 선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때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에 동화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방식대로 행하기를 소망하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 목적의 완성으로서의 윤리

 

기독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만남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각각의 사물은 모두 자신의 텔로스(목적), 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며, 성경의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선함의 원천인 지고선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성경의 하나님을 그들의 목적으로 지향하며, 지적인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은 절대 진리이고 인간의 주된 목적이신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아퀴나스는 인간이 타락과 함께 초자연적 의의 은사인 하나님의 모양을 상실했지만 타락 후에도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에 어느 정도 도달하거나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까지도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초자연적 의의 은사인 하나님의 모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윤리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이성적인 신법에 따라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죄란 이성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덕이란 존재 목적의 성취를 촉진하는 습관이며악 또는 부덕이란 죄가 습관화된 결과라고 강조한다. 아퀴나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성을 통해 어느 정도의 윤리적 삶이나 자연적 덕에 도달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온전한 윤리적 삶은 이성이 제공할 수 있는 최상 이상을 필요로 하며, 오직 계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진 믿음 · 소망 ·사랑이라는 신학적 덕이 추가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생각은 헬라의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전통에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기독교적 덕을 추가하는 중세의 혼합적 윤리 사상의 길을 열었다.

 

루터와 개혁자들 : 믿음에 의한 순종으로서의 윤리


은혜의 윤리      루터는 타락이 우리 존재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쳤기에 이성을 포함한 어떤 인간적 방편으로도 윤리적 삶을 향해 나갈 수 없으며, 이렇게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을 가지지 못한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율법은 죄를 억제하는 기능과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지 깨닫게 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믿음을 통한 칭의는 루터에게 윤리적 삶의 전제요 원천이었고, 덕이란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 주시는 새로운 본성이었으며, 윤리적 삶의 요체는 하나님의 길이 최선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는 삶이다. 루터는 이성적 성찰을 통해 결정한 규범을 삶의 구체적 상황 속에 적용하며 사는 대신, 삶의 구체적 삶의 여정마다 우리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통해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개인의 윤리와 두 왕국      종교개혁 윤리는 사회적 그물망 안에서 정의되던 삶 대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 있는 자율적 개인을 윤리의 핵심 주체로 올려놓았다. 윤리적 짐을 진 개인은 죄가 억제되는 율법의 영역(세속)과 용서가 경험되는 은혜의 영역(교회)이라는 두 영역(두 왕국)에서 살아간다. ‘세속 정부의 의무는 법을 잘 받들고 형벌을 통해 죄를 억제하는 일이며, ‘교회의 의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일이다. 루터의 주된 관심은 각자의 특정한 소명의 구조 안에 있는 삶의 정황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훈계하는 일이었고, 사회질서들은 하나님이 두신 세속 법에 따라 움직인다고 가정했기에 철저한 사회윤리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칼빈주의적 수정

 

칼빈은 루터의 윤리를 두 측면에서 확장시켰다. (1) 칼빈은 루터 사상의 중심인 율법의 일반적 목적신학적 용법외에, 거룩한 삶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3의 용법을 추가했다. 이는 성화를 하나님의 가르침, 특히 십계명에서 계율화된 교훈에 대한 순종의 보는 개혁주의 성화관의 토대를 마련했다. (2) 칼빈은 자연법과 신법이 궁극적으로 동일하다고 선언함으로서 자연법을 성경 계시와 연결시켰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루터주의자들에 비해 더욱 강력한 사회윤리를 만들어 냈는데, 이는 사회가 기독교 윤리 지침에 부합하는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믿음에 따른 것이었다.

 

고전적 사상가들과 우리

 

(1) 우리가 당대 최고의 철학 사상이 확증한 도덕적 탐구의 결과물을 끌어와 기독교적 견지에서 재구성하려 한다면 어거스틴과 유사한 경로를 쫓아가고 있는 것이다. (2) 그리고 복음이 없이도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길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이다. (3) 한편 철학적 전통을 포함한 세상의 지혜를 거부하고, 오직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만이 윤리의 원천임을 믿는다면 루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5장 현대 기독교 윤리학

 


사회 질서의 기독교화를 위한 윤리

 

월터 라우센부쉬와 사회 복음주의     20세기의 도래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을 우선적으로 외부를 향하는 삶으로 이해하는 윤리적 경항과, 이웃에서 선행을 베푸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악을 제가히는 노력까지를 포괄하는 이웃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척도라는 생각이 득세하게 되었다. 사회 복음주의의 옹호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과 협력함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증진시키고 이 땅에서 하나님 통치를 확장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 운동의 대표자인 월터 라우센부쉬는 인간 사회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것과, 가난을 영속화시키는 경제 구조를 변혁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임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주요 산업의 사회 소유화, 노동조합 지원, 탐욕과 경쟁과 이윤 추구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다. 이러한 사회 복음주의의 유산은 WCC삶과 일운동이나 책임 사회’, 그리고 창조 세계에 대한 관심과 같은 에큐메니컬 사회윤리를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초월의 윤리

 

1차 세계대전은 단순히 사회 구조를 변화시킨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서 사회복음 운동을 지배했던 낙관론에 종지부를 찍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사회 질서를 기독교화하려는 시도가 절망적으로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인류에게 화해의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 말씀의 상실이라는 대가를 초래했다는 신념을 공유했으며, 자율적인 도덕적 분별력의 타당성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명령으로 이해되는 도덕적 규범을 유추하려고 시도했다.

 

칼 바르트 : 하나님의 명령으로서의 윤리학      바르트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 그리스도의 주되심, 계시의 주어짐을 강조하며, 신학적 윤리학을 독립된 분과가 아닌 교의학의 일부이자 이면으로 파악한다. 바르트는 윤리적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대답될 수 있고, 기독교 윤리학의 과제는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명령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선이란 바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의 명령을 문자적이고 보편적인 명령이 아닌 삶의 순간마다 다가오는 근본적인 명령에 대한 증거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모습대로 되라고 명령하시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의 말씀에 대해 자발적으로 신앙의 응답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자연법 위에 기독교 윤리를 구축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했지만, 가끔 언약의 외적 기초인 창조 세계의 구조로부터 중요한 윤리적 추론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제임스 거스탑슨 : 하나님께 봉사하는 윤리학       거스탑슨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체제에서 구축된 윤리학 전통을 비판하면서,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 윤리학을 일관되게 신 중심적인 시각으로 회복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 중심적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도덕적 삶이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목적을 이루는데 동참하는 삶임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거스탑슨은 바르트와 달리 우리 너머의 궁극적인 능력에 의존하는 종교적 의식에 호소했으며, 자연과 은혜 사이에는 심각한 모순이 아니라 연속성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자연이 도덕 규범의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은혜로 교정되거나 변화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독교 윤리학이 율법주의로 전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공유하지만,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에 적절성을 지닌 일반적 규칙으로서의 도덕적 원리가 필요하다는 데도 공감한다


기독교적 규범으로서의 사랑

 

어떤 학자들은 하나님 명령의 내용에 대해 성찰한 결과 기독교의 윤리적 삶은 사랑이라는 최고의 법으로 요약된다고 결론내렸다. 이 견해의 선구자인 안더스 니그렌은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운 무조건적 사랑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범주임을 보여 주려고 시도했다.

 

폴 램지 : 원리로 구체화된 사랑의 윤리      램지는 언약과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에 근거한 참된 성경적 윤리의 근본적인 원리로 ‘이웃사랑’을 제시했다. 그는 기독교적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이웃으로 여기고 배려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심 없는 배려’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는 마음을 철저히 포기하고 ‘계몽된 비이기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도 자연법주의자들의 윤리적 통찰을 활용할 수 있지만, 어떤 자연법도 기독교의 사랑이 요구하는 바를 포괄할 수 없기에 그 자체는 절대 기독교 윤리학의 기초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경직되고 규칙 지향적인 다른 모델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동성을 낳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오직 이웃의 필요에 부응한다는 철저한 불변의 전략 때문이었다. 그는 이웃사랑은 성품을 개발함으로서 오는 열매라기보다는 아니라 언제나 현재에 결단할 문제이며, 기독교 윤리학에서 권리란 이웃 사랑에서 역으로 도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셉 플레처와 상황 윤리     플레쳐는 상황에서부터 귀납적으로 시작해 몇 가지 시행원칙을 만들고 여기서 다시 다른 모든 원리가 이 원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단일 규범인 ‘아가페적 사랑’을 도출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전통적인 윤리학적 방법을 뒤집어 나온 결과가 도덕 행위자가 특정한 상황 가운데 ‘그때 거기서’ 가장 선행 행동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극단적 상황윤리인 ‘행동 아가페주의’이다. 여기서 결정의 기초는 각 상황마다 무엇이 최고의 사랑의 행위인지 '상황적 적절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 아가페주의’는 일반적 사랑의 규범 외에 어떤 절대적 도덕 원칙도 인정하지 않으며, 다른 규범을 모두 기껏해야 경험으로 얻은 규칙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한다. 플레쳐는 정의를 사랑과 동일시했는데, 이는 정의란 곧 사심 없고 공평하며 포용적이고 차별 없는 사랑이 실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주의는 커다란 반향과 다양한 논란을 일으켰으며, 하나의 윤리적 방법론일 뿐 본질적인 윤리는 아니라는 비판을 받는다.

 

제자도의 윤리

 

디트리히 본회퍼 : 거룩한 세속성으로의 윤리학       본회퍼는 값싼 은혜와 값진 은혜의 생생한 대조를 통해 자신의 윤리적 견해를 피력했다. 값진 은혜는 성자 하나님의 희생을 비싼 댓가로 치렀으며, 우리에게 순종 즉 제자도의 삶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 그리스도가 신자 공동체에 계신다는 교회론적 사고에서 출발했지만, 옥중에서 깊은 묵상을 거친 끝에 그리스도가 종교적 영역에만 갇혀 있지 않고 세상 속에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쫓아 세상으로 돌아가서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거룩한 세속성’을 그 본질로 한다고 주장했다. 참된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타자를 위한 존재로 살았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쫒아가고 세상에 봉사하면서 기꺼이 상처받고 쓰러지는 것을 감당하겠다는 의미다. 이는 교회가 사람들을 “세상을 위한 교회”로 존재하게 될 때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되기 때문이다.

 

제임스 맥클랜든 : 공동체 안의 제자로서의 윤리      급진적 종교개혁 전통에 선 사상가들은 제자도와 신자 공동체를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학적 논의의 핵심으로 삼고자 했다. 맥클랜던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질서, 인간 사회, 그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세우신 종말론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윤리학도 이에 따라 몸 윤리학, 사회 윤리학, 부활 윤리학이란 범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독교 도덕의 중심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적, 사회적 삶 모두의 변화로 나아가는 새로운 근거와 역동적 힘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도의 모임인 교회는 각 사람과 사회 윤리학을 연결하고 도덕적 자아와 사회적 도덕을 연결하는 고리라고 주장했다. 맥클랜든은 이야기 신학이라는 통로를 통해 윤리적 과제에 접근했으며, 그의 윤리학은 공동체의 제자들을 위한 윤리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의 윤리

 

마틴 루터 킹 : 전투적인 비폭력 윤리        킹은 이론가라기보다 실천가였기에 정교한 신학 윤리학을 형성하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킹은 하나님의 최우선적인 목표가 이 땅에 올바른 사회질서와 경제 질서를 세우는 것이며, 바른 사회 질서는 인간이 우리의 인간적 이상이신 예수님 안에 계시된 모델을 따라 발전하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정의로운 법이란 인간의 품격을 고양시키는 법이었고,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종의 통합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그가 사용한 방식은 비폭력 저항의 방식이었다. 그가 비폭력을 고수한 이유는 폭력이 아무런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믿었고, 그의 투쟁이 악한 권세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의 목표가 적대자와의 화해였기 때문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비폭력이 고통의 가능성까지 수용하는 기독교적 이상에 가장 근접했기 때문이었다. 킹은 이렇게 사랑에서 비롯된 비폭력은 엄청난 선을 낳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 해방 윤리      해방신학자들은 신학이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 기독교적 실천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방신학의 핵심 전제는 신학이 반드시 상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과제는 현존 사회 질서에 의해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침에 응답하는 것이다. 구티에레즈는 성경의 해방 이야기에 근거해 하나님 자신이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고 가난한 자의 편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억압받는 자와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고 확언했다. 그리고 구원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역사 속에서 협력해 불의와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촉진하고 모든 관계의 완전한 인간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는 이웃을 향한 방향 전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으며, 해방을 위한 기독교 선교에서 때때로 폭력은 최후의 수단으로 필요할 때도 있다고 주장했다.

 

로즈메리 래드포드 류텨 : 생태여권주의적 윤리     여권주의자들은 인류 역사 전반에 드리워진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구조를 대체할 수 있는 평등하고 참여적인 모델을 탐구하려고 시도한다. ‘생태여권주의’의 시초인 류터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와 사회 구조 속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과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했으며,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지배/착취”의 체계에서 “생명 사랑의 상호성”으로 바꿈으로서 경쟁적인 소외와 지배의 문화를 연민에 의한 연대성의 문화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류터는 죽음이 죄의 결과가 아닌 자연스러운 결말이고, 죄란 인간의 유한성이 아닌 왜곡되거나 잘못된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건설적인 생태여권주의 윤리를 위해서는 남성적 초월적 신적 존재인 ‘하나님’과 우리를 성만찬으로 부르시는 내재적인 신적 존재인 ‘가이아’의 거룩한 목소리 둘 다를 들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성품의 윤리

 

교회 너머로부터의 목소리       최근의 경향 중 놀라운 일은 일반 윤리학과 기독교 윤리학 모두에서 덕과 성품 형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1) 첫 번째로 현대 여권주의자들은 남성이 윤리학과 윤리적 삶의 개념화 작업을 독점해왔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이 도덕에 대해 유사한 접근방식을 취한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다고 확신했다. 캐롤 길리건은 남성적 시각이 윤리적 질문에 대해 ‘정의’의 관점에서 접근해 형식적인 사유와 권리의 윤리학으로 나아가는 반면, 여성적 접근법은 ‘보살핌’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책임과 연민 또는 보살핌의 윤리로 나아간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보살핌을 중심적 윤리적 개념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덕 윤리로의 전환을 보여 주는 표지로 보인다. (2) 공동체주의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덕 윤리 전통의 부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발견되는 덕 윤리는 우리가 쫓아야 할 규칙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이는 이야기 속에서 자라난 공동 전통에서 시작되고 만들어져 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스탠리 하우어워스 : 평화의 사람을 위한 윤리      하우어워스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이러한 백성이 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공동체의 이야기, 특히 이스라엘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아와 개인의 성품을 정적이거나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개인의 역사를 통해 발전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이야기 속에서 개인적 집단적 삶을 형성하고 계속적으로 안내해 주는 전통과 이야기를 발견한다고 믿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 세상을 위해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구현하며, 기독교 윤리학의 기본 과제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삶으로 구현해내는 백성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교회에게 평화의 백성, 기독교적 성품의 백성이 될 것을 요구한다.

 

복음주의자의 윤리적 과제


칼 헨리 : 성경적 지침에 대한 감사의 순종       칼 헨리는 구속의 메시지가 삶 전체에 대해 의미를 지닌다는 확고부동한 확신으로 다시 한 번 복음을 세상과 연결시키고자 시도했다. 헨리에 따르면 계시는 기독교의 진리를 포함한 모든 진리의 원천이며 이성적 하나님으로부터 이성적 인간에게 다가온 이성적 의사소통의 도구다.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처럼 윤리학의 기초도 성경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에 있으며, 사랑의 내용 역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헨리는 기독교가 개인의 회심과 사회 정의 둘 다를 중시하며, 사회 변혁을 일구기 위해 삶의 모든 영역을 다루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여기에는 불의의 희생자에 대한 사역뿐 아니라 불의의 원인을 치료하고 제거하는 사역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영적 중생이 사회 변혁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함으로서 주류 개신교의 주장과 결을 달리했다.

 

올리버 오도노반 :부활의 관점에서 사는 생활

 

현대 신학적 윤리학의 흐름

 

(1) 기독교 윤리학은 지난 100년 동안 행위에서 존재로 뚜렷하게 이동해 왔으며, 예수님의 본을 닮고자 하는 노력보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관심이 증가해 왔다.(2) 기독교 윤리학의 초점은 도덕적 행위자 개인에서 관계성의 윤리로 바뀌고 있다. (3) 현재라는 상황에서 존재의 목적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독교 윤리는 종말론적 윤리이며 우리의 도덕적 탐구는 모든 창조계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한 시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비전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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