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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문학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 (구시다 마고이치 지음, 심정명 옮김, 정은문고 펴냄)

by 서음인 2020. 9. 17.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는 500권 이상의 책을 남긴 문필가이자 소문난 장서가였던 구시다 마고이치(串田孫一, 1915-2005)월간 사무용품이라는 잡지에 1970년부터 4년간 연재했던 짧은 글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연필 · 지우개 · 클립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물건에서부터, 문진이나 라벨기, 등사판처럼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는 생소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을 거쳐 간 56가지의 문방구에 얽힌 개인적 일화와 단상들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그런데 읽다 보면 눈 밝은 독자는 이 책이 문방구보다 저자에 대해 훨씬 할 말이 많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이 책은 제목만 보자면 일종의 '유사 문방구 백과사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워드 프로세스를 이용한 글쓰기가 보편화되기 전 다양한 문방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열심히 작업했던 한두 세대 전의 ‘저술가’ 혹은 '작가'들에 대한 인류학 보고서에 더 가깝다.

 

저자는 같은 벼루를 50년씩 쓰고 있을 정도로 모든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셀로판테이프를 보면서 이렇게 편리한 물건을 쓰다 보면 반쯤 재미삼아 쓰는 습관이 생기지 않을까하는 염려를 품기도 하는 아끼는 인간이다. 또한 주머니칼을 써본 적이 없는 인간을 상상하면 무시무시하다라고 일갈하며 편리한 연필깎이 대신 굳이 주머니칼로 연필을 깎을 정도로 자동과 편리를 거부한 채 '도구'와 '작업'을 고집하는, "불편을 감수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둘 다 속도와 편리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진 인간형이다. 


이러한 저자의 아낌이나 불편 감수는 단순히 궁핍에 의해 형성된 절약정신이거나 익숙한 과거에 머무르려는 반동적 저항이라기보다, 현대인에게 단순히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한 문방구를 작업의 동반자이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 저자의 애정’으로부터 나온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문방구는 물건이기는 하지만 깊이 사귀면 그저 물건일 뿐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지우개는 잘못 쓴 부분을 지워주는 고마운 물건임에도 장난질과 괴롭힘을 당하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다”와 같은 언급을 통해 평생을 함께 했던 문방구에 대한 저자의 따뜻한 시선과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아무리 어려운 시기에도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문화인이자 교양인이었다. 그는 전쟁 중에도 문구점에서는 질이 떨어지는 허술한 문방구들을 통해서라도 문화를 지키겠다는 저항이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저항을 기념하기 위해 나무젓가락에 못을 박은 컴퍼스나 앰플처럼 병에 든 잉크와 같은 고난’과 저항의 상징들을 계속 보관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영상문화의 위력 앞에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운명이 점차 기울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때, 과연 읽고 쓰는 "문화인" "교양인"들과 그들을 돕는 다양한 문방구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혹시 “아끼는 인간불편을 감수하는 인간이 불과 두 세대만에 희귀종으로 전락해 버린 것처럼, 끝끝내 읽고 쓰기를 고집하는 자들 역시 조만간 "그들만의 수도원"에 고립된 희귀종으로만 존재하게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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