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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톰과 새관점

바울에 관한 새로운 탐구 (티모 라토 지음, 김명일 옮김, 이레서원 펴냄)

by 서음인 2020. 10. 9.

바울에 대한 새로운 탐구 - 샌더스, , 라이트, 바클레이 비평적 읽기는 스웨덴 예테보리의 루터신학교 교수인 티모 라토가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에 속한 주요 학자들의 견해를 간략하게 소개한 후 이들을 루터신학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과 D.A. 카슨/더글라스 무의 손에 잡히는 신약 개론, 제임스 던의 바울에 관한 새 관점, 톰 라이트의 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스티븐 커트의 목회 톰 라이트에게 배우다와 같은 책들을 참조해 이 책에서 다루는 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하고 간단한 단상을 덧붙여 보기로 한다.

 

 

내용요약  

 

1. E.P. 샌더스(E.P. Sanders)

 

샌더스의 생각은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 nomism)라 불린다. 이에 따르면 1세기 유대종교는 통념과 달리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율법을 준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유대교는 율법주의로 알려진 행위종교가 아니라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선택과 언약맺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은혜 종교였다. 율법의 역할은 언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getting in)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staying in) 것이다. 즉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이유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 안에 머무르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이 유대교와 결별한 이유는 유대교의 구원론이 율법주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 외에 어떠한 구원자도 인정하지 않았던 배타적인 기독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유대교를 반대한 이유는 유대교의 구원론이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바울이 발견한 유대교의 잘못은 유대교가 그리스도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2. 제임스 던(James Dunn)

 

제임스 던은 유대종교가 행위종교가 아닌 은혜의 종교였으며, 율법의 역할은 받은 구원 안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라는 샌더스의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 nomism)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는 샌더스와 달리 율법의 행위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해 주는 유대인의 정체성 표시”(boundary marker)인 할례 · 음식법 · 안식일 규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울이 그의 서신을 통해 비난하고 있는 것은 이런 정체성 표지들을 지켜야만 이방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유대교의 민족적인 배타주의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신칭의의 교리는 일차적으로 개인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와 관련된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 바울의 이방인 선교 과정에서 발생했던 어떻게 이방인이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라는 사회적이고 인종적인 논쟁에 대한 결론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의 관심은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에 있다. 이신칭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믿음외에 다른 경계표지들” - 특정 교파의 신학적 신조, 특별한 은사나 체험들, 특정한 문화적 형태에 기반한 기독교적 표현양식들 - 을 진정한 신앙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일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칭의는 배제가 아닌 교회의 일치를 위한 교리다.

 

3. N.T. 라이트(N.T. Wright)

 

톰 라이트는 1세기 유대종교가 행위종교가 아닌 은혜종교라는 샌더스의 주장과, 율법의 행위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정체성 표지를 의미한다는 제임스 던의 견해에 공감한다. 톰 라이트에 따르면 바벨론에서 귀환한 1세기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유배상태에 있다고 생각했으며, 구약의 약속대로 야훼가 시온으로 귀환하여 왕위에 등극한 후 도래할 완전한 해방과 영광스러운 미래를 고대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이 민족적인 기대가 놀라운 방식으로 이미 성취되었음을 깨달았다. 메시아가 오셨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포로 생활을 끝내고 압제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한 민족적 그룹에서 전 세계적 가족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역사의 중간 지점에서 나사렛 예수에 행한 일 - 십자가와 부활 - 을 통해 이룬 성취이자, 하나님이 역사의 마지막에 이스라엘에게 행하시리라고 바울이 기대했던 일이었다. 복음이란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방식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인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해 이스라엘의 소망을 성취한 메시야이신 예수가 곧 주님이라는 주되심의 선포이다. 칭의란 구원을 얻는 방법에 관한 것(구원론)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교회론)에 관한 문제이다.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정체성 표지의 준수라는 1세기 유대교에 맞서 믿음을 그 대답으로 제시했다.

 

4. 존 바클레이 (John M.G. Barclay)

 

존 바클레이는 그리스-로마와 유대 문화의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선물이라는 단어는 초충만성, 단일성, 우선성, 비상응성, 유효성, 비순환성이라는 여섯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중 어느 것도 이 단어의 의미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은혜 또는 선물에 대한 바울의 입장도 다양한 견해가 혼재했던 1세기 유대교의 음성 가운데 하나다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이들 중 주로 수혜자의 요구에 앞서 선물이 주어졌다는 우선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의 가르침이 집중하는 것은 가치와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의 비상응성이며, 선물 주고-받기의 관습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그레코-로마 사회에서 교회를 핍박했던 바울에게 그리스도라는 선물이 비상응적으로주어진 것은 당대의 사회적 가치 체계를 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선물이 수혜자의 자격과 상관없이 주어졌다는 것이 받은 사람이 되갚을 의무가 없다는 함의를 반드시 내포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에 반대한 이유는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에 유대인의 민족적 특권이라는 가치 규범을 더한 것이기 때문이다.

 

5. 저자의 결론

 

바울 신학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그리스도 중심적 읽기나 민족 중심적 읽기는 루터신학의 인간론적 접근 방식을 능가하지 못한다. ‘율법의 행위는 샌더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부정되었거나, 던과 라이트의 견해처럼 민족적인 특권을 기초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거부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개혁자 루터가 밝히 드러냈듯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이다. 또한 바클레이의 선물에 대한 연구는 그리스-로마 문화라는 맥락을 넘어 고대 종교 세계 한 가운에서 유일무이하고 독창적인 걸작으로 돋보이는 바울 신학의 순수한 은혜개념을 온전히 다루기에 역부족이다. 우리는 새 관점 학파의 여러 학자들이 아니라 개혁자 루터야말로 사도 바울과 같은 세상에서 살고, 같은 공기를 마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개인적 단상

 

 

1. 바울에 관한 새로운 탐구는 사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 아니라, 전통적 이신칭의의 가르침에 대해 더 많이 알려주는 책이다. 저자는 이 작은 책에서 새 관점 학파에 속한 학자들의 견해를 설명하는 일보다, 그들을 '신인협력설'의 혐의로 비판하고 전통적인 이신칭의를 옹호하는 데 훨씬 많은 분량과 노력을 할애한다. 위에 적은 학자들의 요약에도 이 책은 그다지 많은 도움을 주지 못했다. 혹시 새 관점 학파의 견해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원하는 독자라면, 이 책이 생각만큼 친절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일단 나는 이런 전문적인 신학 논쟁에 끼어들어 독자적 견해를 펼칠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신칭의란 배제가 아닌 교회의 일치를 위한 탁월한 교리라는 새 관점 학파의 주장은 믿음이외에 다른 교리적 · 체험적 · 율법적 경계표지들” - 예를 들어 전통적 이신칭의까지를 포함한 특정 교파의 교리에 대한 동의 여부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정죄 여부 - 를 진정한 신앙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오늘날의 한국교회에 특별히 적실해 보인다. 그리고 톰 라이트가 복음을 구원의 체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선포로 정의함으로서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고질적인 이분법을 극복하고 복음의 총체성이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 역시 탁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3. 특정한 교리나 견해를 '수호'하거나 '전파'해야 할 의무나 책임을 지고 있지 않은 아마추어 탐구자인 내게, 신학공부란 탁월한 학자들이 펼치는 흥미롭고 독창적인 사유의 향연에 참여해 즐거움을 만끽하며 자유롭게 노는일이다. 앞으로도 진지하고 엄밀한 학문적 분석이나 논쟁은 학자들의 몫으로 줘버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분출하는 더 많은 새 관점들과 함께 '놀면서' 더 큰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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