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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톰과 새관점

목회, 톰 라이트에게 배우다 (스티븐 커트 지음, 에클레시아북스 펴냄)

by 서음인 2016. 5. 30.

1. 영국의 현직 성공회 목회자가 쓴 이 책의 목적은 톰 라이트의 신학을 소개하고, 그것을 지역교회의 목회사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아닌 내게 이 책의 가치는 목회적 적용보다는 구약에서 시작하여 복음서와 바울서신에까지 이르는 이 논쟁적인 학자의 방대한 신학을 깔끔하고 명료하게 정리해 주었다는 데 있다.

 

2. 그의 사상이 맞는지 틀리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애초에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지만 "교회는 21세기의 문제에 1세기의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16세기의 질문에 19세기의 대답을 제시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그의 문제의식에는 상당히 공감하는 편이며, 그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1세기 유대교라는 맥락에서 신구약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를 철저하고 일관성 있게 재구성해 낸 그의 사상 역시 내게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특히 복음을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는 그의 입장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고질적 이분법을 극복하고 총체적 선교를 지향하기 위한 설득력 있는 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3. 앞으로의 독서를 위해 이 책에서 요약한 그의 사상을 다시 요약하기로 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긴 사람일수록 톰 라이트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이유는 하나의 패러다임 혹은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 다른 쪽으로 향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은 성경에서 온 친근한 단어나 개념이 그들이 통상적으로 들어오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때 더 특별히 나타난다. 그의 신학은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에게 친숙한 단어나 개념들을 과격하게 바꾸지 않으면서도 새관점 학파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된 1세기 유대교라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맥락에 위치시키며,  이것이 그의 신학에 대해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불편함과 당혹함을 느끼는 이유중 하나일 것이다.   

 

예수의 의미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오직  역사적인 맥락 가운데서만 발견될 수 있다.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려는 모든 시도는 (1) 1세기 유대교라는맥락 안에서 받아들일 만 해야 하며, (2) 2세기 초반까지 기독교인들이 예수에 관하여 소유했던 신앙의 출발점으로서 믿을 만 해야 한다.  복음서들은 우연히 이전 시기의 전통들과 일부 공명하는 내용을 가진 독립해서 존재하는 내러티브가 아니라  예수 이야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 세기 동안 배우로서 역할을 담당해 온 한 연극의 절정에 해당하는 막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볼 수 있는 특정 본문을 발견하거나 예수의 사역을 보여주는 모형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 안에서 살았고, 삶과 상징들을 표현했던 유대교 세계관을 형성했던 주도적 내러티브를 발견하는 일이다.    

 

구약 성서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시며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사건으로, 그 목적은 아담의 죄와 그 죄가 세상에 끼친 악의 영향을 무효로 만들고 자신의 창조 세계를 회복하려는 그의 계획을 진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의’ 란 이와 같이 그의 창조세계를 회복하고 새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헌신(언약적 신실함) 을 묘사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토라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기 위한 (getting in) 수단이 아니고 받은 은혜에 머무르기 위한 (staying in) 삶의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며, 성전은 언젠가 당신의 임재로 전 세계를 채우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미리 맛보게 하는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언약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데 실패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변함없는 ‘의로움’ (언약적 신실함) 으로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자신의 계획을 위해 일하셨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죄를 피하고 이방의 빛이 되는 그의 소명을 이루는 데 최종적으로 실패했고, 그 결과는 성전의 파괴와 유배였다. 그 이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으로 다시 귀환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외세의 지배라는 형태로 악의 세력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1세기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유배 상태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구약의 약속대로 더 ‘위대한 출애굽’과 야훼가 시온으로 귀환하여 왕위에 등극한 후 있게 될 완전한 해방이 실현되기를 고대했다. '죄사함' 이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언약적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행동하실 때 이스라엘이 전체로서 유배상태에서 해방되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었다.

 

이러한 역사의 절정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와 관련하여 1세기 유대인들의 관심은 ‘내가 죽을 때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가 아니고 ‘야훼가 이스라엘의 해방을 가져오실 그날은 언제인가’ 에 있었으며, 많은 유대인들은 이 해방이 흔한 오해와 달리  피조세계의 종말이나 파괴를 수반하지 않고 (따라서 세상의 종말을 암시하는 구약의 묵시적 표현들은 은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힜다. 그리고 부활이란 일차적으로 (1) 이스라엘이 유배상태로부터 귀환할 것이라는 사실, (2)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갱신된 피조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용어였으나, (3) 후대에 들어서면서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의미도 가지게 되었다. 이렇듯 부활에 죽음의 극복이라는 의미가 추가됨에 따라 부활신앙은 급진적이고 전복적인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형태의 종말론이 바리새인들에게 요구한 실천의 핵심은 야훼가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때까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독특성을 유지하라는 것이었으며, (1) 그것은 가장 일차적으로는 율법, 특히 그중에서도 정결법이나  음식법안식일 엄수와 같은 의식법의 준수를 의미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러한 행위들이 장차 하나님이 의롭다 하실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현재의 증표’ 라고 이해했다. (2) 한편 이스라엘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현재의 증표'는 그 땅 자체와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이었으며, 음식법과 안식일 할례 역시 그 증표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율법의 행위란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 행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장차 회복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누구인지를 겉으로 확인해 주는 '현재의 증표', 다른 말로는 ‘정체성 표지 (경계표지 boundary marker)’였다.

 

예수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시급한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하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적 전통에 서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신다고 주장했다. 예수의 가르침과 이적, 실천과 상징적 행위들은 모두 그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배 시대를 끝내시고 새로운 종말론적 시대를 도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예수는 이러한 종말론적 사건을 일으키는 메시야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분명한 자기 이해를 갖고 있었고, 그에게 주어진 메시야의 소명은 폭력을 사용하는 혁명의 길이 아닌 이스라엘의 구원을 담당하기 위한 종이 되어 고난과 죽음을 인내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예수의 죽음은 어둠의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 승리와 이스라엘에 바라던 참된 해방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었다. 복음서의 내러티브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와 악의 문제를 처리하시는가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내러티브에서 부활이란 기괴하고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하는 사랑이 우주적이고 전반적인 악의 세력과  전면전을 벌여 승리했다는 사실의 필연적인 귀결이자 그 가장 강력하고도 확실한 증거다.        

 

예수의 비유들은 이스라엘의 유배상태로부터의 귀환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사건이 이제껏 기대해왔던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한 심판에 대한 예수의 경고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깨닫지 못하고 예수가 선포하는 행동강령이 아닌 기존의 행동강령을 계속해서 추종하는 자들에 대한 것이었으며, 묵시적 언어를 사용하여 결국 로마의 손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한다. 예수는 이렇듯 유배시대가 그 끝을 맞았기 때문에 이제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사용했던 유대교 율법을 포기해야 하며, 기존의 분리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소명에 의거하여 이방인도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는 것을 상징하는 식탁교제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예수는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주어진 소명과 관련하여 새롭게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도전했으며, 이 대안적인 소명과 삶의 핵심은 예수 자신을 따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기꺼이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을 포용하여 자신의 공동체에 결합시킬 때 그들은 육체적 도덕적으로 변화되었고, 이러한 변화는 예수가 선포하고 있었던 왕국의 종말론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유배상태가 진정으로 끝났으며 하나님의 새로운 종말론적 시대가 동텄다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알린 사건은 예수의 부활이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그 경험을 통해 현 시대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던 사건이 이 시대의 한가운데 한 사람 예수에게 지금 발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시대가 그 사람 예수를 통해 이 세계로 침투해 들어왔음을 알려주는 증표였으며,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야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주로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곧 세상의 주라는 구약의 증거와 일치하며, 바로 이것이 바울이 복음이라는 단어로 말하려는 내용이다.

 

이렇듯 복음이란 개인이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이거나 천국에 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부활을 통하여 메시야요 주라고 선언된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가 왕이 되셨고, 이제 그의 세계를 바로잡는 과정을 시작하셨다는 선포이다. 복음을 주되심의 선포로 이해하는 이러한 방식은 구약 이사야 40장의 용법과 완전히 일치할 뿐 아니라, 당시 로마 황제들이 자신에게 그 용어를 적용하는 행위에 대한 의도적 도전이 담겨져 있다. (1) 이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모든 행위 즉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모든 노력들은 모두 복음사역으로 정의되며, 따라서 복음전도와 사회정의라는 고질적 이원론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2) 또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혹은 주시라는 바울의 선언은 이 용어들이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당대의 문화 속에서 가이사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이 칭호와 슬로건을 의도적으로 예수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당대 로마제국과 그 황제숭배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이었다. 이렇듯 예수가 주시라는 좋은 소식을 선언하는 것은 언제나 당대의 불의한  정치권력을 포함한 모든 악의 권세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을 포함하는 정치적인 행위이다.

 

예수의 죽음과 속죄에 대한 다양한 이론 중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것은 예수의 죽음이 죄와 악의 세력이라는 적들에 대한 위대한 승리라는 고전적 견해 혹은 승리모델이며, 이러한 승리의 결과 예수 안에 속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는 세례와 믿음이라는 포괄적인 수단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게 될 뿐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예수에게 연합된다. 그리고 성령에 의해 발생하는 이 연합을 통해 그들의 죄가 용서되며,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 신세계 안에서 갱신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속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전통적 프로테스탄트의 견해인 개인적 죄사함이라는 사법적 모델을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로서의 예수의 죽음이라는 더 넓은 맥락 안에  통합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전통적 개신교의 주장처럼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부여하시는 의의 상태 (전가된 의) 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언약적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을 가리키는 용어로, 이 의는 이스라엘의 메시야인 예수의 신실함을 통하여 성취되었으며, 따라서 이 신실함의 결과인 그의 죽음이야말로  언약의 절정이었다. 유대교는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구원을 획득하는 종교가 아니며, 유대교에서 율법의 행위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을 실제 삶에서 나타내도록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에게 주신 수단이자, 하나님이 미래에 의롭다고 선언하실 사람들을 지금 표시해주는 ‘현재의 표지’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이후 이 현재의 표지는 더 이상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고 (1) 메시야 예수에 대한 믿음과 (2) 신자들을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로 연합시키는 세례라는 언약의 증표로 바뀌었으며, 이는 이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는 길이 열렸다는 개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통적으로 구원과 비구원을 가르는 배제의 목적으로 흔히 사용되어왔던 이신칭의의 교리는 세례와 메시야 예수를 믿는 것 이외의 경계표지를 거부하는 포용의 교리로 바뀌게 되며, 어떻게 구원받는가와 관련된 구원론의 영역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수 있는가와 관련된 교회론적 영역에 속하게 된다.

 

파루시아는 야훼의 날을 성취하고 창조세계를 회복하려는 그의 계획이 완성되는 사건으로 그때 우리는 바로 이 땅에서 그 실재를 누리게 된다. 또한 부활의 때 있게 될 심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변화 중 첫 번째 열매, 즉 ‘예수는 주이시다’라고 고백하는 믿음을 기초로 하되, 그가 살아온 인생 전체에 부합하여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메시야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 사람들의 종국은 끝없는 고통을 받게 되는 지옥이나 영혼의 소멸이 아닐 것이며, 그 존재는 지속되겠지만 그들 안에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소명은 미래의 부활 생명을 가능한 최선을 다해 현재로 앞당기려고 노력함으로서 부활절의 조망 아래 삶을 영위하는 것이며, 교회의 임무는 이 땅에서 ‘하늘 시민’으로 살아감으로서 예수가 주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새 창조의 실재를 그려내고 구체화하는 말과 행동을 통해 이 일을 수행함으로서 그의 구원이 이 세계 안으로 더 전진해 들어오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역사적 교회에 대한 충성은 복음 자체에 대한 충성의 일부이다.  성령은 신자들이 새 창조의 임무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규칙을 지키는 삶’ 이 아니라 ‘성령이 가져오는 새 창조 안에서 살아가는 끊임없는 노력’이다. 또한 예배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가 하나님의 미래의 실재를 미리 앞당기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며, 성례전은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와 새 창조를 가져오는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례전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단일한 순간으로 집약시키시며, 이러한 성례전이 평범하고 세속적인 모습을 띤다는 것은 구원의 목표가 이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갱신되고 변형된 세계임을 보여주는 핵심적 증표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가 그의 피조 세계에 주권적으로 행사되는 이야기로,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세계관을 버리고 성경의 내러티브와 그 세계관에 따라 살도록 초청하며 도전한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 것을 지속할 뿐 아니라, 예수가 불러일으키는 부활의 생명을 보여주는 말과 행동을 통하여 성경의 이야기를 급진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계가 우리 기독교인들처럼 그 이야기 안에서 살라고 도전하는 것이다. 성경 이야기의 첫 네 막의 제목은 (1) 창조 (2) 타락 (3) 이스라엘 (4) 예수이며 다섯째 막의 제목은 (5) 교회이다. 이 다섯째 막은 첫 1장만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으며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경의 내러티브 속으로 들어가 다섯째 막의 나머지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살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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