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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톰과 새관점

바울에 관한 새 관점 (제임스 던 지음, 에클레시아 북스 펴냄)

by 서음인 2016. 5. 31.

1. 바울에 대한 “새 관점 학파”의 대표주자중 한 명인 제임스 던의 책이 나왔다. 이 관점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이 있지만, 이런 저런 비판과 옹호의 소문들을 통하는 것보다 대표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리라.

 

2. 제임스 던은 1세기 유대종교가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강조하고 율법이란 언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getting in) 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것(staying in) 과 관련이 있다는 샌더스의 소위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 nomism) 의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는 샌더스와는 달리 율법의 행위란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해 주는 경계표지들(boundary marker), 즉 할례나 음식법, 안식일 준수 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며, 바울이 그의 서신을 통해 비난하고 있는 것은 이런 율법의 행위들을 준수해야만 이방인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유대교의 민족적인 배타주의라고 주장한다.

 

3. 따라서 저자는 루터 이래로 개인의 구원을 규정하는 교리로 인식되어 온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바울 사도의 이방인 선교사역 중에 발생한 사회적이고 인종적인 논쟁이라는 배경 하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전통적 관점인 이신칭의의 개인적 차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신칭의의 교리가 일차적으로 “어떻게 개인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 라는 구원에 관한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사도바울의 이방인 선교 과정에서 발생한 “어떻게 이방인이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라는 논쟁에 대한 결론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4. 제임스 던이 보기에 이러한 이신칭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믿음 이외에 다른 “경계표지들” - 예정이나 제한 속죄와 같은 특정 교파의 신학적 신조들이나 방언과 같은 특별한 은사나 체험들 또는 특정한 문화나 시대의 기독교적 표현양식들, 심지어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칭의’ 에 관한 교리를 주장하는 ‘행위’까지를 포함하여 - 을 진정한 신앙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오늘날에 특별히 필요하고 적실한 교리다. 그에 따르면 이신칭의의 진술이 함의하는 바는 “당신과 다르고 당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다른 신자들을 온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는 것이다!!

 

5. 이 관점, 혹은 이에 대한 여러 비판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정밀한 역사적, 주석적 작업을 요하는 전문적 학자들의 몫일 뿐 내 능력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일이다. 다만 이 책을 읽는 중 떠오르는 두 가지의 단상을 덧붙이기로 하자.

 

(1) 저자도 지적했듯이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종교가 본질상 ‘은혜’ 의 종교이며,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언약은 ‘은혜’ 의 언약이라는 사실은 사실 개혁주의권의 복음주의 전통에서 자란 내게 매우 익숙한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샌더스의 “언약적 신율주의”란 어찌 보면 구약성경의 메시지를 요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언약적 신율주의”의 전통에 서 있는 구약성경에서 출현한 종교가 어떻게 전통적인 이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극단적인 율법종교로 변질되었을 수 있었겠는가? 하기야 오늘날 한국의 일부 기독교의 행태를 보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2) 만약 제임스 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믿음 이외의 특정 교리나 술담배 문제 혹은 특별한 영적 체험과 같은 “경계표지들”을 ‘참된’ 신앙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오늘날의 상황에 특별히 적실한 가르침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관용과 다원성이 그 자체로 진리의 시금석이 된 현대의 정황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 보자면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 역시 당대의 정황에서 그러했듯이 ‘시대적 적실성’ 혹은 ‘당대의 필요성’ 이라는 과제가 제임스 던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재해석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꼭 잘못된 것일까? 오히려 그러한 창조적 재해석이야말로 진정한 신학의 과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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