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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모음/믿음을 묻는 딸에게 1

티내는 사람, 삼잡이 할머니

by 서음인 2021. 1. 30.

어느 날 진료실로 중년 여성 환자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이 거북해 클리닉을 찾으셨다고 합니다. 눈꺼풀을 뒤집어 검사해 보니 결막에 흔히 생기는 이물의 일종인 결석이 발견되었습니다. 가볍게 제거해 드리고 나니 곧바로 불편이 사라지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감사를 표하면서 진료실 문을 나가던 환자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말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자꾸 껄끄러운 느낌이 들고 티가 들어간 것 같아 옆집에 사는 티내는 사람을 찾아갔는데도 해결이 안 되서 할 수 없이 원장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에 시원하게 해결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 그 환자에게 저는 티내는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 혹시나 해서 찾은 두 번째 옵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티내는 사람’,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입니다. 예전에 시골 마을에서 안과 치료를 담당하던 나이 많은 여성들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 제가 처음 시골에서 진료를 시작했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비교적 흔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환자들에게 들은 바로는 대체로 눈을 후후 불거나, 혀로 핥거나, 특별하게는 눈에 깨를 넣는 등의 방법을 통해 티를 낸다고합니다. 처음 두 가지 방법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깨를 넣어서 어떻게 티를 낼 수 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실제로 티내는 사람들이 넣은 깨가 눈에 들어간 상태로 찾아왔던 환자들이 있었는데, 이분들의 말에 따르면 깨는 눈에 들어가도 그다지 심한 이물감을 유발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마도 깨가 눈을 자극해 눈물이 나게 하는 효과를 이용해 눈 안에 들어간 이물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과거 ‘티내는 사람과 거의 동일한 역할을 담당하던 분들이 삼잡이입니다. '삼'이라는 단어가 눈에 생겨 충혈을 유발하는 익상편이나 검열반 같은 변성질환을 지칭하는 호남 지역 방언이니, '삼잡이'란 눈에 생긴 염증이나 충혈을 잡는’, 즉 치료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이분들 역시 티내는 사람처럼 모두 나이든 여성들이었습니다. 추측해 보건데 티내는 사람이나 삼잡이는 아마도 남녀유별을 강조하는 엄격한 유교적 가부장주의 사회에서 공식적인 의술의 도움을 받기가 쉽지 않았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몸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이어 온 온 민간의료의 지혜를 습득해 활용하던 지혜로운 여성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에서야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여성들의 민간의학적인 관습을 모두 주술적 행위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금지했던 중세 서양이었다면 마녀로 몰려 화형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겠네요.

 

삼잡이라는 말을 들으면 지금도 생각나는 환자 한 분이 계십니다. 외딴 섬에서 평생 살았고 안과에는 처음 오신다는 연세가 많은 할머니였는데, 눈을 검사해보니 백내장도 많고 염증도 심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눈 상태가 좋지 않은데 어떻게 지금까지 안과에 한 번도 들르지 않았느냐고 질문했더니, 지금까지 눈이 불편할 때마다 이웃에 사는 삼잡이 할머니에게 치료받으며 잘 지내셨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안과를 찾아올 생각을 하셨냐고 물으니, 얼마 전에 그 신통한 삼잡이 할머니가 그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내키지 않는 걸음을 했다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네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아플 때마다 그 할머니를 먼저 찾았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이쯤 되니 저는 그 삼잡이 할머니가 정말로 궁금해졌습니다. 그 환자의 눈 상태를 보면 그 할머니가 제가 가진 현대의학의 도구보다 더 나은 치료의 수단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한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도 동네 사람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요?

 

어쨌든 그 환자는 제게 백내장 수술을 받은 후 시력을 회복하셨고, 저를 돌아가신 삼잡이 할머니를 잇는 안과 분야의 새 권위자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환자를 통해 돌아가신 삼잡이 할머니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오래 전에 남편을 잃고 아들까지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낸 채 오랫동안 홀로 삶을 이어가던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소 그 동네에 사는 모든 자신의 환자(?)들과 심지에 가족도 모르는 은밀한 사정까지 깊게 대화하며 지내는 사이였다고 합니다그 말을 듣고 나는 이 할머니의 놀라운 비법에 대해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삼잡이 할머니가 가졌던 비법은 고난의 통해 체화된 공감의 능력과 인격적 교제를 통해 다져진 신뢰의 힘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그 환자들이 할머니에게서 실제로 얻었던 것은 약간의 육체적 치료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전인적 치유가 아니었을까요? 마치 저를 전적으로 신뢰해 주시는 몇몇 환자들이 때로 치료의 효과가 만족스럽지 않음에도 그분들의 불평을 끝없이 들어주는 저를 차마 내치지 않고 계속 찾아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는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타자의 운명에 참여하려는 능동적인 사랑의 본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난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은 사랑할 능력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예수병원을 창설한 설대위(David John Seel) 박사는 우리가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는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짓이겨지는 포도가 되어야 하며,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고 위로를 베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자신의 모습을 낮추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뒷모습,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

 

제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그분이 높은 하늘에 앉아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들을 가차 없이 지옥으로 보내는 냉정한 종교 재판관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우리의 하나처럼 고난받았기에 인간의 고난에 깊이 공감하실 뿐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를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오늘도 내가 가진 현대의학의 효과적인 치료 수단에 더해 고난당한 신으로부터 나오는 치유의 능력까지 겸비한  좋은 의사, 좋은 제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진료실로 들어갑니다.  

 

 

 

 

하희정,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 선율, 2019

위르겐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김균진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79

설대위, 상처 입은 세상, 상처 받은 치유자들, 김민철 옮김, IVP, 1997

폴 투르니에, 성서와 의학, 마경일 옮김, 다산글방,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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