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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모음/믿음을 묻는 딸에게 1

내가 잘한 걸까요

by 서음인 2021. 2. 1.

낙도 지역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가족의 손에 이끌려 찾아오셨습니다. 가족들에 따르면 원래 활발한 성격이던 할머니가 10여년 전부터 점차 말수가 줄면서 집안에만 계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루 벌어 하루 살기 바빴던 가족들은 치매가 왔으려니 생각하고 그냥 집에 모셔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점점 더 일상생활을 잘 못하시는 것 같아 신경과를 찾아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치매 문제는 아니라면서 안과에 한번 가보라고 해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검사해보니 심한 백내장으로 시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당장 수술을 시행해 할머니는 시력을 회복하셨으며, 가족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몇 년 후 그때 뵈었던 할머니의 아들이 진료를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할머니가 밝은 눈으로 잘 지내시죠”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 표정이 조금 어두워지시면서 할머니는 잘 지내시는데 자신들이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눈이 밝아져 새 인생을 얻은 할머니가 잘 보이게 되자 원래의 활발한 성품이 되살아나 계속 바깥으로 돌아다니시는데, 그새 치매가 심해지면서 자꾸 엉뚱한 곳으로 가시거나 사라지시는 바람에 모든 가족들이 동원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할머니를 찾으러 다니느라 애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대기실로 들어오자 병원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오랫동안 목욕을 하지 않고 속옷을 갈아입지 않았을 때 풍기는 지독한 지린내가 코를 찔렀기 때문입니다. 저도 시골의사 노릇을 오래 하면서 웬만한 냄새에는 눈하나 깜짝 안할 정도의 내공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차였지만, 이 할아버지에게 나는 지린내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보호자로 함께 찾아온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워낙 고집이 세서 좀 씻으라고 해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을뿐 아니라, 지금까지 가족들이 병원에 가보자고 권해도 강하게 거부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진료해 보니 심한 백내장으로 거의 실명상태나 다름없었고 즉시 백내장 수술을 시행한 결과 할아버지는 마침내 시력을 회복하셨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진료실 차트 대기창에 그 할아버지의 이름이 다시 떴을 때 저는 반사적으로 다시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멋진 옷을 차려입은 깔끔한 노인 한 분이 진료실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제 기억 속에 있던 지독한 냄새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요. 할아버지는 연신 감사를 표하며 웃는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서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보호자로 함께 왔던 할머니가 진료차 찾아오셨습니다. 할머니께 “할아버지가 잘 보이게 되고 깨끗해지셔서 기쁘시죠”라고 물었더니, 한숨을 쉬시면서 할아버지가 수술 후 눈이 잘 보이게 되자 예전 습관이 나와 하루 종일 술로 지샐 뿐 아니라 심지어 할머니에게 폭언과 손찌검까지 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차라리 냄새가 났을지언정 안보여서 얌전히 있었을 때가 더 나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의사는 “나는 환자의 건강과 행복한 삶을 가장 우선으로 여길 것이다”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마음에 새기며 의업의 길에 들어섭니다. 안과의사에게 그 맹세는 무엇보다 환자의 시력을 회복시켜 밝은 세상을 보게 해 주는 것을 통해 실현됩니다. 그래서 모든 안과의사는 환자가 더 잘 보이게 된다면 그것으로 자신의 소임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안과의사 생활을 하다 보니 아주 드물지만 위의 경우와 같이 제 수술이 환자의 주변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를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저는 환자가 잘 보이게 해준 것으로 내 책임을 완수한 것일까요? 환자가 시력을 회복해 결과적으로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저는 잘한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다 보면  '의무론'과 '공리주의'라는 윤리의 상반된 두 원칙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의무론자들은 개별 인간의 건강이나 생명은 모두 동등하게 소중하며, 누구도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타인이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한 환자의 치료 여부나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의료의 대원칙이며 일견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특별한 상황에서 가끔 난관에 부딪힙니다. 예를 들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사람들로 가득 찬 야전병원에 아무리 치료해도 사망 위험이 높은 중증환자 한 명이 먼저 도착하고 비교적 가벼운 처지로 충분히 살릴 수 있는 환자들 여럿이 나중에 도착했다면 어떤 환자를 먼저 치료해야 할까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의료체계에 과부하가 걸려 더 이상 모든 환자를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과연 특정한 기준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치료해 살려야 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비난받을 행위일까요?

 

이에 대해 공리주의자들은 인간의 건강이나 생명도 상황에 따라서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원칙에 따라 우선순위가 판단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천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자의 무의미한 생명 연장 치료를 위해  제한된 공적 자금으로 운용되는 의료보험 시스템이 소생 가능성이 높은 환자 여럿을 살릴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의료비를 부담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말합니다. 한스 로슬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익명의 아이들 수백 명을 놔둔 채 눈앞에 보이는 몇 명의 아이들을 완벽하게 치료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인간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좋은 곳에 쓸 수 있는 자원을 훔치는 행위일 수도 있다고 강조합니다.  최대한 많은 아이의 목숨을 살릴, 비용 효과가 가장 뛰어난 방법을 찾는 것이 오히려 가장 덜 매정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저는 환자의 생명권과 건강권은 그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며 원칙적으로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설령 아무리 세상에 엄청난 해약을 끼쳤거나 끼칠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생명과 건강에 대한 권리는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하며, 우리에게는 그들의 건강을 차별하거나 치료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경험한 두 가지 예는 아주 가벼운 경우입니다만, 저 역시 치료의 결과가 보호자들에게 끼칠 어려움을 알았더라도 환자가 원했다면 수술을 거부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공리주의의 원칙을 의료의 일반적 윤리로 삼게 된다면 ‘공공의 복리’를 위해 특정 권력이나 공동체에 의해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의 건강이나 생명을 경시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사회의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던 유태인, 성소수자, 정신병자를 모두 가스실로 보냈던 나치의 극악한 범죄를 어떤 근거로 단죄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위에 들었던 예에서처럼 그 원칙이 적용될 수 없는 상황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한정된 인원과 자원으로 수많은 환자를  맞아야 하는 봉사의 현장에서는 그런 상황이 결코 드물지 않습니다. 저는 의료봉사에 참여하던 초창기에 몇몇 봉사의 경험이 많은 원장님들이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수술이 필요한 환자보다 비교적 수술이 쉬운 환자들을 위주로  수술을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 불편한 마음을 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면서 기간은 한정되어 있고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술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상황에서는, 시간이 많이 걸리면서 수술효과도 확실치 않은 한 명을 수술할 시간에 확실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환자 두세 명을 수술해 주는 것이 더 인도적인 선택일 수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건강이나 생명에 대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관점에서 고민하거나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깊은 숙고 없이 절대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백내장 수술자로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수술을 통해 빛을 찾아 기뻐하는 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제 수술 때문에 결과적으로 고통을 겪게 되었던 환자나 보호자들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봉사의 현장에서 더 많은 분들에게 빛을 선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던 환자들의 낙담한 얼굴이  훨씬 더 생생합니다. 제 한계를 벗어난 일이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다고 자위해 보지만 그분들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앞으로 제 수술이 환자와 보호자 모두에게 행복과 기쁨만을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한정된 자원 때문에 치료의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사람들을 봐야 하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스텐리 그랜츠,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와 흐름』, 신원하 옮김, IVP, 2001

피터 싱어, 『더 나은 세상』, 박세연 옮김, 예문아카이브, 2017

한스 로슬링 외, 『팩트풀니스』,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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