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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모음/믿음을 묻는 딸에게 1

고통의 문제

by 서음인 2021. 2. 5.

I

 

예전에 제가 월급의사로 근무하던 병원이 있던 지역에서 겪었던 일입니다. 새로이 그 병원에 근무하기 시작한 후 얼마 안되어서부터 이 지역에 유난히 다래끼 환자가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이곳에 다래끼 환자가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질문하니 직원들은 제가 오기 전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갑자기 다래끼 환자가 늘어난것 것 같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병원 인근에 있던 안과 원장님께서 마취를 제대로 안하고 다래끼를 째는 바람에 환자들이 다래끼 수술에 대해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제가 충분한 마취를 시행한 후 비교적 통증 없이 수술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인근의 다래끼 환자들이 몰려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누가 명의냐고 물으면 대부분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려내는 의사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동네병원 수준에서 소문난 명의들이란 아주 친절하거나 최대한 아프지 않게 치료해주는 의사인 경우가 많습니다. 병원에 찾아온 환자들에게 처지나 수술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거의 예외 없이 첫 번째로 나오는 질문은 “얼마나 아파요”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겠지만,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대하다보면 고통에 대한 두려움 역시 그에 못지않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안락사란 고통에 대처하는 가장 소극적이고 비생산적인 방식이며 누구도 그것을 찬양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손봉호 교수조차도, 누구도 극심한 고통 앞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사람을 비판할 권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II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안방에서 영상이나 이미지로 소비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수전 손탁은 우리가 접하는 고통받는 인간의 이미지들은 찍는 사람에게나 보는 사람에게나 피사체의 고통이나 인간성을 고려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편안한 실내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감상할 ‘특권’을 누리는 우리를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구경꾼, 겁쟁이, 관음증 환자로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손탁은 이러한 고통의 이미지들이 범람할수록 사람들은 폭력에 중독되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며, 설령 누군가가 그 사진들을 보면서 연민을 느낀다 해도 그것은 자신들의 무죄함을 입증하는 알리바이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합니다.

 

문제는 누구도 자신에게 닥친 고통에 대해서는 구경꾼이나 관음증 환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변증가인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며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데 도움을 주어 하나님이 반항하는 영혼의 요새 안에 진실의 깃발을 꽃을 수 있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표준적 대답으로 여겨질 만한 이 우아한 명언을 남긴 루이스마저도, 막상 인생의 말년에 만나 사랑에 빠졌던 여성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처참할 정도로 자기 통제를 잃고 무너지고 맙니다. 그는 “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시기에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이냐”라고 울부짖습니다. 

 

저는 다른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고통들을 겪어 왔고, 고통의 기원과 목적 그리고 해결방식에 대한 많은 설명을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가르침을 포함해 나와 세상의 모든 고통을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는 완전한 이론을 접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직까지 제게 고통은 어떤 이론이나 설명으로도 완벽히 설명되지 않는 수수께끼이자 절대자의 심연을 보여 주는 신비로 남아 있으며, 이 사실은 앞으로도 크게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통에 대해서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세 가지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점차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설명이나 훈계가 아니라 공감과 위로라는 것, 내 고통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지와 무감각을 깨우는 가장 효과적인 각성제라는 것,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야말로 한 사람의 성숙을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표지라는 것입니다.  

 

III

 

지금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타당한 설명이나 훈계도 별 도움이 되지 않거나 오히려 고통을 악화시키는 폭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명한 인물인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완전한 사람에서 졸지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가족과 자녀들을 모두 잃고 자신도 심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러한 욥을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은 현세적인 인과응보라는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욥이 당하는 극심한 고난은 그의 죄에 대한 징벌이기에 하루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저는 어떤 고통이 죄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만,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고통이 죄의 결과라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정도로 ‘신실한’ 신자들을 보면 강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통에 대한 심오한 해석과 설명보다 함께 있어주고 공감해주며 위로와 애도를 표하는 것입니다.  

 

나의 고통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높여 주는 가장 강력한 촉매입니다. 욥은 극심한 고통이라는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자신이 부당한 고통을 당한 유일한 사람이 아니며, 이 세상의 고난받고 가난한 자들이 지금까지 처해 있던 자리에 자신이 지금 막 끼어들어 한 자리를 차지했을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C.S. 루이스는 자신이 겪었던 괴로움이 연인이 당한 고통 때문이 아니라 연인의 부재로 인해 자신이 당해야 하는 고통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덜된 인간”이라며 자신을 자책합니다. 저는 루이스의 말대로 고난이 가끔씩 신적 존재를 상기시키는 메가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보다 훨씬 강력하게, 그리고 예외 없이 고통당하는 이웃의 비명을 들려 주는 강력한 보청기로 작동한다고 확신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정도는 한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 인간이자 신실한 기독교인인지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후에, 그의 죄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부재와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의 결여”였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악의 평범성(혹은 진부성)"이라 이름붙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벌어진 전대미문의 홀로코스트는 일반인이 가지지 못한 사악함으로 무장한 악의 화신들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모자란(진부한) 인간들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의인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며, 죄인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IV

 

손봉호 교수는 인간에게는 쾌락의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성향보다 고통을 피하려는 생각이 훨씬 강하며, 우리의 윤리적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가장 적은 사람이 고통받는" 최소 고통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수전 손탁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값싼 연민으로 고통받지 않는 나의 현실을 위안하는 대신, 타인의 고통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특권과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숙고하면서 그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무언가 행동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저는 제게 닥친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극복할 능력도, 타인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심오한 철학적 · 종교적인 설명을 제공할 실력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통 받는 이웃과 세상이 지르는 비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의 일부를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는 의술의 도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게 찾아온 환자와 우리가 사는 세상이 겪는 고통에 대해 더 민감해지고, 진료실 안팎에서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작은 실천의 한 걸음을 내디디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의 얼굴이 하나의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됨

타자를 선대할 때 나의 존재는 나에게서 타인에게로 무게중심이 옮겨짐 (시간과 타자 해설 pp 145)

타자를 위한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

자크 데리다의 극단적 환대 - 타자에게 나에게 오라고 말함

손봉호의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도로테 죌레, 『고난』, 채수일 최미영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3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욥기』, 제3 세계 신학연구소 번역실 옮김, 나눔사, 1987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이후, 2007

C.S.루이스, 『고통의 문제』, 이종태 옮김, 홍성사, 2002

C.S.루이스, 『헤아려 본 슬픔』, 강유나 옮김, 홍성사, 2013

 

 

손봉호, 『고통받는 인간』, 서울대학교출판부, 2014

레난 길론, 『의료윤리』, 박상혁 옮김, 아카넷,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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