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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모음/믿음을 묻는 딸에게 1

수술의 신

by 서음인 2021. 1. 31.

저는 백내장 수술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의사입니다. 이 말은 백내장 수술이 제가 거의 매일 경험하는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의 하나라는 뜻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백내장 수술과정을 말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저는 잠시 머리를 써서 전체 과정을 마음속에 그려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백내장 환자가 수술대 위에 누워 있다면 저는 언제 어디서든 '생각 없이' 일사천리로 수술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가히 ‘몸에 익었다’ 또는 ‘몸이 기억한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백내장 수술이 단순히 제가 아무 때나 불러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도구'나 '하인'이 아니라, 독자적인 인격을 갖추고 나를 주관할 뿐 아니라 존중까지 요구하는 ‘신’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친숙한 동반자가 가끔씩 그리스 신화의 야누스처럼 그 친절한 얼굴 대신 낯설고 무시무시한 또다른 얼굴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백내장 수술의 ‘신’이 마치 그리스 신화의 신들처럼 임의로 변덕을 부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신은 대체로 예측이 가능하며 호불호가 명확합니다.

 

‘수술의 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수술자는 칼을 잡고 누군가가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을 때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낍니다. 내 손을 통해 누군가에게 빛을 찾아줄 수 있다니! 우쭐한 마음이 생기고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수술의 신'은 이런 상태를 절대 오랫동안 방치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수술 중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응징합니다. 교만이 치명적인 이유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이어지고 이는 반드시 집중력 하락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처음 운전을 배우는 사람은 사고를 잘 내지 않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시작했을 때 사고율이 높아지는 것과 유사합니다.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으면서도 수술의 전 과정 동안 동일한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훌륭한 수술자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 중 하나입니다. 교만의 꿈은 달콤하지만 그 열매는 쓰디 쓸 뿐 아니라 때로는 치명적이기도 합니다. 

 

‘수술의 신’이 싫어하는 또 다른 태도는 '욕심'입니다. 금전적 이득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수술이나 술기를 무리하게 시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환자가 백내장 수술을 받아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때로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안과 의사는 가끔 과연 이 환자를 수술해야 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할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의사도 사람인지라 환자의 필요보다 금전적인 이득을 수술 결정의 계기로 삼으려는 유혹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백내장이 없는 환자에게 무리하게 수술을 시행하는 ‘생내장’ 수술이라는 신조어까지 있을 정도이니까요.  또한 어떤 수술자는 수술의 결과에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의 작은 문제도 남겨두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꼭 필요하지 않은 술기를 무리해서 시도하기도 합니다. '수술의 신'은 돈이든 자기만족이든 욕심에 눈이 먼 수술자 역시 오래 용납하지 않습니다.

 

‘수술의 신’이 싫어하는 세 번째 자세는 '불신'입니다. 이는 위에 언급한 교만과 반대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수술자는 교만해서도 안되지만 자신을 불신해서도 안됩니다. 일단 손에 칼을 잡은 수술자는 신이 자신의 손을 지켜준다는 생각을 넘어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손이 곧 신의 손이며 지금 신이 내 손을 통해 일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처럼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손을 신뢰하는 수술자의 특징은 '오컴의 면도날'을 휘둘러 목표까지 가는 최단거리의 길을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수술자는 수술 중에 일관성 없이 이런저런 술기를 시도하거나 필요 없는 행동을 자꾸 반복합니다. 상황에 꼭 필요한 술기 외에 일체의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훌륭한 수술자는 모두 미니멀리즘의 신봉자라 할 수 있습니다. '수술의 신'은 '믿는 자'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수술의 신이 싫어하는 마지막 태도는 '적당주의'입니다. 이는 두 번째 태도인 욕심과 대치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술의 신은 절대 “어떻게 되겠지”라는 적당주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의 환자를 적당히 수술하고 싶은 의사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대충'은 수술자의 부실한 마음가짐보다, ‘눈’보다 ’손‘이 앞서는 부주의 때문에 발생합니다. 좋은 수술자와 그렇지 않은 수술자는 얼마나 정교한 ‘손’을 가졌느냐 만큼이나, 얼마나 날카로운 '눈'을 가졌느냐의 여부에 따라 갈리게 됩니다. 어쩌면 문제를 발견하는 ‘눈’이 문제를 해결하는 ‘손’보다 우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수술시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은 문제를 발견할 “눈”을 가지지 못한 수술자는, 언젠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할 만큼 큰 사고를 만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술의 신' 태만함이나 성급함으로 자신의 수술을 '적당히' 마치려는 의사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주의사항만 잘 지키면 평생 ‘수술의 신’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행복한 수술자로 남을 수 있을까요? 문제는 수술의사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평생 이 모두를 완벽하기 지키기가 극히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생긴 수술을 복기해 보면 대부분 나도 모르게 잘못된 태도로 수술에 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온전한 마음가짐과 완벽한 술기로 무장하고 수술에 임했음에도 정말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때 인간의 한계를 알려주고 끝없는 겸손을 요구하는 그 신의 이름은 두렵고 떨리는 “알 수 없는 분”이 됩니다.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는 종교적 경험의 본질인 ‘성스러움’은 절대성에 대한 원초적이고 비합리적인 감정으로,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자연적인 감정’과 ‘질적으로 다른 그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스러움’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절대자 앞에서 느끼는 철저한 비하나 무화의 감정을 동반하는 ‘두려운 신비’와, 알 수 없는 평안과 구원의 즐거움을 주는 ‘매혹적인 신비’라는 두 가지 길로 나타난다고 강조합니다. 저는 루돌프 오토가 말한 ‘경외’의 태도야말로 우리가 수술(의 신)을 대하는 가장 적절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한없이 매혹적인 수술의 신을 친근히 여기고 사랑하되, 때로 두려운 존재이기도 한 그에 대한 존중을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평생 많은 동물들을 키워 왔던 엔도 슈사쿠는 그와 교감했던 동물들이 그저 개나 작은 새가 아니며 그들의 눈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배후에서 슬픈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고 멀리서 우리를 지켜주는 어떤 존재의 투영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저 역시 수술 현미경을 통해 바라보는 수많은 환자의 눈 뒤편에서 수술자의 마음과 태도를 응시하고 판단하는 어떤 존재인 '수술의 신'을 보게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신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만, 저는 그 신의 실체가 바로 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도 수술 전 그 존재에게 겸손한 마음을 품되 자신감을 잃지는 않으며, 탐욕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면서 적당주의의 함정에서도 벗어나도록 기도합니다.  

 

 

 

루돌프 옷토, 『성스러움의 의미』, 길희성 옮김, 분도출판사, 2003

이길용, 『종교학의 이해』, 한들출판사, 2007

엔도 슈사쿠,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 안은미 옮김, 정은문고,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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