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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영성제자도

우리 아버지 - 알렉산더 슈메만의 주의 기도 해설 (알렉산더 슈메만 지음, 정다운 옮김, 비아 펴냄)

by 서음인 2021. 2. 23.

『우리 아버지』는 미국에 정교회 신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했고 기존에 교회사 혹은 교회법의 하위 분야였던 전례 신학을 독립적인 신학의 한 분야로 정착시키는데 공헌한 에스토니아 출신의 정교회 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이 쓴 자그마한 주의 기도 해설서다. 슈메만은 본래 구소련인들이 듣도록 ‘자유유럽방송’으로 송신되었던 일련의 강연을 엮은 이 책에서 단순하지만 심오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함몰되어 궁극적 목적과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종교를 고발하며, 주의 기도가 담고 있는 ‘영원’과 '계시'의 차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는 십계명을 현세적인 윤리적 계명이나 미래의 구원과 관련된 종말론적 표상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 창조된 이유와 영적 세계를 밝히 드러내는 하나의 계시이자, 하나님의 아버지됨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지금 여기서’ 열리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실현된 종말론’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 같다. 단순한 양식 속에 영원을 담아낸 정교회의 성상인 ‘이콘’을 닮은 그의 매력적인 해설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서론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기도만을 우리에게 남겼으며, 이 짧고 단순해 보이는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심장으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이다. 이 기도는 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와 한 사람 한 사람의 필요와 질문을 충족시켜 주지만, 그 핵심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으로 남아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 궁극적인 것, 가장 높은 곳으로 우리를 부른다. 이 기도는 우리가 본래 창조된 이유와 영적 세계를 밝히 드러내는 하나의 계시이며, 가치의 위계질서를 세움으로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해준다. 이 기도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산만한 정신을 모으고 궁극적인 것과 마주하라고 부르는 내면의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가 거룩한 창조주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선물이며, 모든 위로, 기쁨, 영감의 원천이다. ‘아버지’에 ‘우리’가 더해진 이 호칭은 절대자에 대해 인간이 고안해 낸 모든 개념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다른 개념이 담아내지 못하는 친밀감과 사랑을 드러낸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거룩하신 그분의 아버지됨에 기반한 종교이며, 이는 그리스도교의 기초가 지적 개념이나 철학적 추론이 아닌 우리의 전 생애에 흐르고 있는 인격적인 사랑의 체험이라는 의미다.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은 인간의 영광과 운명 그리고 궁극적인 소명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자 그분의 집인 하늘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호칭은 단순히 기도를 시작하는 말일 뿐 아니라, 모든 간구를 가능하게 하며 모든 간구에 의미를 불어넣는 기도의 바탕 그 자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오며      거룩함은 최상의 가치를 지녔기에 마땅히 경외하고 숭배해야 할 존재나 활동이자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소망이다. 거룩함을 경험한다는 것은 세계 너머를 마주하는 신비와 마주하는 것이며, 우리와 조우한 거룩은 즉시 우리의 삶으로 흘러들어 우리를 매혹하고 사로잡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이 기도는 거룩한 분을 실제로 보고 받아들인 사람의 외침이자, 오직 그분 안에만 충만한 삶과 행복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사람의 간구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이 빛과 환희와 찬미로 가득차며, 아버지께서 만물을 당신의 거룩한 지혜와 거룩한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기를 간구한다. 그러나 어둠과 악, 피상성, 소란스러움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하늘을 향한 끊임없는 내면의 분투가 필요하다. 이 모든 어려움을 깨달으면서도 그 간구가 얼마나 좋은지를 알고 그 기도를 말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복음은 영혼의 불멸이나 내세의 존재에 대해 답하지 않으며, 거룩하고 생명 자체이실 뿐 아니라 빛이고 사랑이며 지혜이신 영원한 분을 마주하는 그 나라로 우리를 부른다. 복음은 우리 삶이 그분의 빛과 그분에 대한 지식과 그분께 받은 사랑으로 가득할 때 그 나라가 임한다고 이야기하며, 거룩한 생명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지금 여기’의 삶이 영원 그 자체로, 즉 그분 자신으로 채워지게 되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지금 여기, 오늘 이곳, 현재 처한 환경에서 그 나라와 만나 우리의 삶의 그분의 나라의 권능과 빛으로 채워지기를, 분명하게 악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계가 이 빛을 받아들이기를, 우리가 그분의 나라를 배신하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어둠에 침잠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 나라에 속해서 빛을 보고 느낀 이에게 이 말은 기도이기보다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심장, 맥박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도록 도와 주시기를 구하는 이 간구는 이해하기 쉬워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가장 어려운 간구에 속한다. 이 간구는 한 사람과 신앙과 종교성이 풍요로운지 거짓인지를 식별하는 궁극적인 기준이 되며. 우리 삶의 목적과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검증해 준다. 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나의 뜻’ 혹은 ‘우리의 뜻’을 아버지의 뜻으로 대체하는 배신을 반복한 끝에 ‘유사 종교’로 전락되는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해 왔다. 우리가 진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갈망하는 고된 소명을 받으면 사람들은 즉시 우리에게서 등을 돌릴 것이고, 친구들은 우리를 배신할 것이며, 우리는 홀로 남겨져 박해받고 외면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야말로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받았다는 징조다. 그리고 이 좁고 고단한 길에 서 있는 이들에게 그분은 인간의 승리가 아닌 아버지께서 이루시는 영원한 승리의 면류관을 주신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인간은 먹거리에 의존해 살아가고 그가 먹은 음식이 그의 생명이 되지만, 단순히 물리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살지 않고 그분을 닮고 그분의 형상으로 자라기 위해 살아간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땅을 다스리라는 소명을 받음으로서 오직 음식에만 의존하는 상태를 극복했지만, 아버지에게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며 그 방편으로 음식을 찾음으로서 다시 음식에 의존하는 노예, 세상의 노예, 죽음의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아담으로서 음식과 물리적 생명에만 의존하는 상태를 심판하고 극복하셨으며, 이는 음식을 먹는 일이 필멸하는 세상의 노예가 되는 일이 아니라 다시금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을 받는 일, 거룩한 생명, 자유, 영원과 연합하는 사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나누는 식사인 ‘유카리스트’는 바로 음식의 이 새로운 의미를 드러냄으로서 계시를 완성한다. 이 기도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고통까지를 포함한 모든 생애를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선물로 받게 해달라는 간구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주님께 우리 죄를 용서받는 일과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주는 일은 서로 이어져 있으며, 바로 이 연결에 용서의 풍요로운 신비가 담겨져 있다. 이 기도에서 이야기하는 죄는 법이라는 기반 위에 서 있는 사회적 개념인 범죄와 달리 인간의 양심 위에 서 있다. 양심이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확신, 어떤 범죄나 악한 행위가 아닌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은 악, 우리 심연에서 일어난 타락으로 인해 저 모든 범죄가 일어났다는, 그러나 어떤 법도 그 타락을 벌하는 데는 무력하다는 확신이다. 법은 해를 끼친 사람에게 벌을 주기 전까지 만족하지 않으나, 도덕법인 양심은 법을 만족시키려 하기보다 온전함과 사랑을 회복시키려 한다. 이 세상의 어떤 법도 회복에 관해서는 무력하며, 우리가 서로 용서할 때 위에 계신 분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상호 연결된 용서만이 회복을 통한 양심의 정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 간구는 우리의 도덕적 정화와 거듭남을 위한 간구다.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악에는 설명하거나 정당화할 만한 어떤 기반도 없으며, 시험, 유혹, 우리 신앙을 무너뜨리는 의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악의 기원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이탈이며, 악이 지닌 무서움은 선한 힘이 악보다 강하다는 믿음을 무너뜨리는데 있다. 거룩하신 아버지께서는 악을 해명하시기보다 악에 저항하고 악을 극복할 힘을 주시며, 악에 대한 승리는 악을 이해하고 해명할 능력이 아니라 충만한 믿음, 온전한 소망, 완전한 사랑의 힘에서 나온다. 우리는 이 간구를 통해 악과 고통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이 약해지지 않기를, 사랑이 고갈되지 않기를 구한다. 또한 우리는 주의 기도를 통해 비인격적인 힘이 아닌, ‘악한 자’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시기를 간구한다. 이 세계에 퍼져 있는 악은, 어떤 비인격적 힘이라기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 책임, 결단이 낳은 비극이기에,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개개인이 악을 선으로 이기는 것이 필요하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이 엄숙한 찬미와 함께 주의 기도는 왕좌에 오른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 가지 주요 상징, 세 가지 주요 단어, 세 가지 성경에 바탕을 둔 의미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등장한다. 우리가 이 기도를 기억하고 말하는 한 우리의 삶은 언제까지나 그분의 나라를 위해 열릴 것이고, 그분의 권능으로 채워질 것이며, 그분의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어둠과 증오에 맞서게 되면 악은 그 힘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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