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 기독교/영성제자도

존중 (존 비비어 지음, 두란노 펴냄)

by 서음인 2021. 10. 3.

1. 내가 좋아하는 독서의 격언 중 하나는 “사람에게 아주 작은 도움도 주지 못할 정도로 쓸모없는 책은 이 세상에 한 권도 없다”는 로마의 정치가이자 저술가 大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 23?~78)의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제자훈련 과제인 존 비비어의 『존중』을 훓어본 후로 이 격언에 대한 내 확신을 바꾸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2009년에 발간된 이 책이 지금까지 48쇄나 찍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2. 이 책의 논지는 간단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령 그것이 부당해 보일지라도 각 영역 (정부, 직장, 학교, 가정, 교회)에 위임된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명하셨으며, 우리가 그 명령에 따르면 그 정도에 상응해 부분적인 혹은 완전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존중’은 표면적 주제일 뿐 이 책의 진짜 키워드는 ‘권위’와 ‘복’이며, 이 책의 중심에는 “권위에 대한 존중(순종)이야말로 복 받는 비결”이라는 변형된 번영신학의 가르침이 자리잡고 있다. 책의 내용에 대해 더 이상의 논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몇 가지 우려되는 부분은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 저자는 "하나님 나라에는 서열과 질서와 위임된 권위가 있으며 .... 민주주의의 사고방식으로는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심지어 하나님 나라의 불완전한 전조인 교회조차 황제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을 피라미드식의 수직적 위계질서로 조직하는 로마제국의 사회구성 원리인 ‘후원자-종속관계’(patron-client relations)를 그대로 따르는 대신, 그리스도를 유일한 ‘후원자’로 모실 뿐 구성원들 상호간에는 기능에 따른 구분 외의 모든 사회적 위계와 차별이 철폐된 수평적 관계를 지향했던 ‘에클레시아’라는 새롭고 급진적인 대안 공동체였다. 타락한 세상을 보전하기 위해 잠시 허용된 ‘보존질서’들의 현세적인 위계적 구성원리를, 모든 차별의 철폐와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을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이상과 혼동하는 저자의 생각은 꽤 심각한 신학적 오류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대적이고 유일한 ‘인격적 순종’의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문제는 자크 엘륄이나 월터 윙크의 통찰대로 정치나 사회뿐 아니라 교회나 가정까지를 포함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스스로를 우상화하고 절대적 순종까지 요구하려는 특성을 지닌 영적인 실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모든 권위가 가진 힘과 범위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며, 어떤 권위도 스스로를 절대화하거나 유보 없는 존중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강력히 선포해야 한다. 위임된 목적에 적합하게 행사되는 권위에 대한 기독교인의 자세는 로마서 13장이 가르치는 ‘기능적 복종’이며, 월권을 자행하거나 명백하게 불의한 권위에 대한 태도는 계시록 13장이 보여주듯 이의제기에서부터 불복종과 순교까지를 포함하는 ‘비폭력 저항’이어야 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권력이든 경제 체제든 종교적 권위든 스승의 가르침이든 부모의 권위든 이 세상에서 무제한적으로 허용되거나 무조건 순종해야 할 권위는 아무것도 없다.

 

5. 저자는 권위를 존중하면 그에 상응하는 복을 받는 것이 영적인 원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심지어 부당한 권위에까지 순종했던 사람들이 받았던 수많은 ‘복’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런데 만약 위에서 말한 대로 세상의 모든 권위가 지속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영적 실체라면, 불의한 정치적 ․ 경제적 ․ 종교적 권위를 존중해서 받았다는 ‘복’은 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혹시 그들이 받은 '복'이 단순히 세상의 힘과 대세에 기민하게 순응한 결과이거나 심지어 영적 우상숭배를 행한 댓가일 가능성은 없는가? 오늘날 교회에 복받은 간증들만 그렇게도 차고 넘치는 것은 혹시 교회가 그런 사람들만 ‘존중’한 나머지 ‘복받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에 설 자리를 없애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6. 존 하워드 요더에 따르면 국가는 타락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세상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보존질서’이며, 그 기능은 소극적으로는 질서의 유지이고 적극적으로는 ‘정의’와 ‘평화’의 시행이다. 그리고 성경이 보여주는 정의의 특징은 고아와 과부, 노예와 나그네를 우선적으로 편들고 배려하는 ‘편파적 정의’다. 하나님이 편파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해 뒤틀린 거의 모든 인간사회가 소수자와 약자들에게 압도적으로 부정의하고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7.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국가’란 그리스도인이 지도자로 세워졌거나 교회에 특별히 호의적이거나 한 나라를 '성시화' 또는 '기독교화' 하겠다고 나서거나 율법의 일부 조항을 전 국민에게 강제하려는 국가가 아니라, 자신에게 위임된 고유한 임무에 충실해 세상을 좀 더 정의롭고 평화롭게 만들며 소수자와 약자들의 권익을 강력하게 지켜주는 국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위임된 권세를 올바로 이행하는 국가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저자의 생각처럼 복음전파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권력에 대해 복종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섬김, 심지어 참된 예배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