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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훈련/책별연구후기

야고보서 (2)

by 서음인 2021. 7. 12.

1. 야고보서는 율법의 실천을 중시하던 대도시의 유대인 하층민 집단과 함께했던 야고보가, 자신의 ‘회중’들을 위해 ‘복음’ 전승을 창조적으로 풀어 쓴 책이 아닐까? 채영삼교수는 이 책에서 야고보서가 “예루살렘의 주요 사도적 전승에 따라 내려오는 유대적 전승에 깊이 뿌리내린 기독교 신앙의 유산”에 뿌리박고 있다고 말한다. 선교 역사학자인 앤드류 월스는 복음이 문화의 프리즘을 거쳐 어떤 집단에 들어가면 반드시 재번역의 과정을 거치며, 이는 정통에서의 일탈이라기보다 기존의 ‘복음’이 알아채지 못한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과정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서신은 바울서신의 수신자들과는 다른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지닌 한 유대 그리스도인 집단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에 응답하기 위해 창조적으로 재서술된 복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시기적으로 보자면 바울서신이 야고보서의 ‘복음’을 창조적으로 재번역했다는 것이 더 사실에 부합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고보서에서 채영삼 교수가 시도했듯 복음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발견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바울서신과는 결이 다른 야고보서만의 독특하고 다채로운 '복음'을 찾아내 즐기는 것이 맞지 않을까?

 

2, 야고보서를 읽으면서 루터가 우리 시대에 돌아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해 보았다. 루터는 자신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이신칭의에 대한 수많은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목숨이라도 걸 각오가 되어있을 수많은 교회가 차고 넘치도록 자리잡은 한국의 상황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오직 믿음”의 기치를 눈 부릅뜨고 수호한다는 바로 그 교회들이 맘몬을 숭배하고 성직을 매매하며 목회를 세습하는 모습을 목도하며 경악하며 고민에 빠질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하나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다가, 그가 과거 지푸라기 서신으로 평가절하했던 바로 그 말씀, 야고보서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다”라는 구절을 접하고는 이거라고 무릎을 칠 것만 같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자행한 여러 교회들을 찾아가 정문에 그들의 행위에 대한 95개조의 반박문을 다시 붙이고, “너희들은 땅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라고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새로운 개혁을 시작할 것 같다.

 

3. 야고보서의 부와 가난에 대한 가르침은 마치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직접 주시는 말씀 같다. 내가 이해한 그 말씀들의 요지는 부가 그 자체로 악은 아니지만, '부자의 DNA'가 그리스도인 개인과 교회 공동체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든 공동체든 부자이면서도 부자의 DNA에 지배받지 않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돈은 일견 가치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돈과 가까워져 보면 곧 돈의 ‘인격성’을 깨닫게 된다. 돈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에게 복을 베풀며, 자신을 소홀히 여기는 자에게는 절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좀 더 친해지려고 시도하면, 맘몬은 돈을 사랑하는 열망과 돈을 벌수 있는 태도로 무장한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요구하며, 결국은 자신과 다른 가치 - 가족, 윤리, 하나님 - 사이에서 무엇을 추구할지 선택할 것을 강요한다. 그래서 엘륄은 철저하게 세상의 질서(필연의 질서)에 속해 있는 돈은 우리에게 경배를 요구하는 우상이며, 철저하게 악마적이기에 결코 기독교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부자이되 맘몬에게 무릎꿇지 않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깨끗한 부자”라는 불가능한 이상을 실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같아서는 부자도 제자도 둘다 어려울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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