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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훈련/책별연구후기

잠언

by 서음인 2021. 8. 4.

1. 지혜문학서들은 굉장히 솔직하다. 잠언은 걱정 없이 오래 사는 것 - 장수와 평안 - 을 삶의 이상으로 찬양한다. 아가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성애에 대한 솔직하고도 긍정적인 묘사다.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인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성의 목소리로 노골적이고 대담하게 성애를 묘사하는 노래를, 그것도 성경 언에서 듣는 것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전도서는 인간이 삶의 여정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허무감을 너무도 생생하게 표현하며, 그 강렬한 쓸쓸함과 허무의 잔상은 심지어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지혜자의 마지막 권면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지혜문학서의 내용들은 역사적으로 교회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마땅히 멀리하거나 극복하거나 적어도 ‘신앙’이라는 재갈을 물려 철저하게 제어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던 것들이다. 나는 이렇게 성경의 ‘신앙적’인 부분과 쉽게 조화되지 않는 지혜문학이 정경 안에 포함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삶에 대한 과도한 ‘신앙주의’가 잘못된 것임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2.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삶을 치열한 영적 전쟁이 펼쳐지는 전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일수록 세상의 모든 일을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의 안경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해도, 그가 살아가면서 서게 되는 거의 대부분의 자리는 절대선과 절대악, 진리와 거짓 중 한 곳이 아니라, 흑과 백 사이의 수많은 회색조 스펙트럼의 어딘가에 위치한다. 이는 그가 살면서 내려야 하는 판단과 결정의 압도적 다수가 ‘진리’가 아닌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는 의미다. 사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지탄받거나 조롱받는 이유 중 많은 경우는 ‘상황’과 ‘지혜’에 속한 영역에까지 함부로 ‘선악’의 잣대와 ‘진리수호’의 칼날을 들이대면서 자신들의 무지와 편협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진리'가 아니라 더 풍성한 '지혜'다.

 

3. 잠언은 권선징악과 인과응보가 창조의 원리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은 그렇게 질서 있게 굴러가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 속에서는 힘 없는 의인들이 고난받고 권세 있는 악인이 득세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살아갈수록 세상사가 선과 악으로 무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에 인간이 선과 악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의 삶이란 모든 것이 명료하게 정리된 절대 확신의 세계에 확고하고 평안하게 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불의한 세상 속에서 풀리지 않는 억울함과 해결되지 않는 회의 그리고 엄습하는 허무감과 생의 마지막까지 씨름해야 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제한되고 구부러진 잣대에 '계시'와 '신앙'의 이름을 어설프게 덧씌워, 신의 자리에서 함부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심판자 놀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4. 잠언서를 포함한 성경의 지혜문학서를 통독해 보면, 하나님이 생로병사에서 자잘한 희노애락까지를 포함하는 인생길의 모든 여정을, 꼭 ‘종교’라는 외피가 덧씌워져 있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귀히 보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노골적 연애시인 아가나, 하나님께 끊임없이 항변하는 욥의 이야기, 일견 천박한 성공학 교과서처럼 보이는 잠언, 극단적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전도서와 같은 책들이 감히 '성경'의 한자리를 버젓히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 제자의 삶이란 욥의 친구들처럼 세상만사를 어떻게든 ‘믿음’의 이름으로 설명해 내야 직성이 풀리는 숨막히는 ‘신앙 기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덜 종교적이더라도 스스로에게 진실하고 이웃과 화평하며 타자를 환대하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내게 지혜문학의 결론은 탁월한 종교인이 되기전에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5. 잠언서는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지도층으로 살아가게 될 남성들을 위한 권면 혹은 교육 매뉴얼인 것처럼 보인다. 이 텍스트의 주 독자인 남성에 대한 잠언의 묘사는 입체적이고 생생한 데 반해, 여성에 대한 묘사는 상당히 전형적이고 평면적이다. 잠언에서 여성은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된 채 오직 가정 안에 묶인 존재로 그려지며, 여성에 대한 평가는 주로 그 여성이 남편과 가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라는 관점에서만 이뤄진다. 공적 영역에 등장하는 여성은 한편으로는 ‘여성 지혜’라는 모습으로 이상화되어 있으며, 다른 편으로는 남성의 성공을 방해하는 사악한 팜므 파탈로 그려진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성녀’와 ‘악녀’로 정형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트렘퍼 롱맨의 말처럼 여성에 대한 진술을 포함해 고대근동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잠언의 ‘지혜’가 문자 그대로 시공을 초월한 절대진리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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