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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사회/정치경제사회

위험사회 (울리히 벡 지음, 새물결 펴냄)

by 서음인 2016. 5. 31.

얼마 전에 발생했던 일본의 지진해일과 그로 인한 원전 방사능누출 사고는 근대화의 결과 도래한 산업사회가 내부에서 발생하는 묵시론적 재앙에 의해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86년에 처음 나온 이후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 책에서 저자는 근대화의 결과 도래한 이와 같은 ‘위험한’ 산업사회를 위험사회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위험은 과거에는 富를 위해서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개인적이고 우연적인 난관이었으나, 현대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과학기술체제 자체에 의해 체계적이고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정상적 개연성으로 변했으며, 그 결과 근대사회는 언젠가는  현실화될 수 밖에 없는 재앙과 위험이라는 위태로운 기초에 세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위험사회에서 나타나는 위험의 특징은 (1) 방사선과 같이 인간의 평상적인 지각능력을 벗어나 있어 인지가 불가능하며 (2) 특정 위험에 대한 사회적 위험집단이 발생하면서 위험의 불평등이 나타나고,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끼치며, 그 위험의 결과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한 지역이나 심지어는 전 인류를 절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의 위험은 더 이상 무릅쓸 수 있는 위험이 아니기에, 경제적 부를 희생할지라도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에게 주어진 문명사적인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울리히 벡은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험사회로 귀착되는 근대 산업사회의 원리들을 반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려고 시도한다. 그에 의해 성찰적 근대화로 명명된 이 과정의 요체는 과학기술의 과정에 대한 대중의 참여와 개입, 그리고 다양한 하위정치 영역의 활성화로 정리될 수 있다. 즉 그는 성찰적 근대화라는 목표가  (1) 과학자 집단과 기업이 독점적으로 생산하고 활용하는 과학기술의 전 과정에 대안과학을 통해 대중이 비판적으로 참여함으로서, 그리고 (2) 산업사회의 무비판적인 진보담론에 맞서는 대항담론을 제시할 수 있는 시민단체나, 언론, 사법부와 같은 다양한 하위정치의 영역을 활성화하고 참여를 보장함으로서 위험의 생산이나 분배에 성찰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위험이란 발전에 따르는 부차적인 부산물이 아닌 언젠가는 실현될 연기된 필연성일 수 밖에 없다는 그의 충격적인 통찰은 불행하게도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자연파괴나 원전 방사는 유출을  포함한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위험을 생산하는 독점적이고 교조적인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비판적 개입과  다양한 하위정치영역을 통한 대항담론의 관철이라는 그의 제안은  오늘날 예를 들면 전문가와 대중들이 함께 참여하는 환경 운동이나, 원전이나 기타 위험시설에 대한 반대 운동의 형태로 상당 부분 현실화되고 있다. 결국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과 그것이 가져다 줄 장및빛 미래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그는 이 책을 통해 참된 예언자로 입증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진보가 아니고 더 많은 성찰이요, 더 많은 부가 아니고 더 많은 참여라는 그의 결론에 대해서도 마땅히 동의해야 할 것이다. 


2017년 8월의 단상 - "위험사회"와 전문가주의의 함정   얼마 전에 작고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를 과거에는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한 개인적이고 우연적인 난관이었던 '위험'이, 과학기술체제의 발달과 함께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정상적 개연성으로 변해버린 "위험사회"로 정의합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나 요즘 말썽인 살충제 달걀 같은 같은 사례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그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이 '위험'에 대해 "성찰적 근대화"라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 과정의 요체는 과학기술의 과정에 대한 대중의 참여와 개입, 그리고 다양한 하위정치 영역의 활성화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그는 성찰적 근대화라는 목표가 (1) 과학자 집단과 기업이 독점적으로 생산하고 활용하는 과학기술의 전 과정에 대안과학을 통해 대중이 비판적으로 참여함으로서, 그리고 (2) 산업사회의 무비판적인 진보담론에 맞서는 대항담론을 제시할 수 있는 시민단체나 언론, 사법부와 같은 다양한 하위정치의 영역을 활성화하고 참여를 보장함으로서 위험의 생산이나 분배에 성찰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사건사고로 인한 '위험'에 노출되고 있고, 그 위험에 대한 정보와 관리를 특정한 '전문가집단'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 새겨들을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한 분야의 전문가로 행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꼭 과학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할지라도 "전문가주의"란 결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용어를 빌자면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문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삼위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 - 특별히 모든 분야의 '전문가(집단)뿐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다루는 신학 및 그 전문가(집단)까지도 - 은, 맹목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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