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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예술/미술

미의 역사 ‧ 추의 역사 ‧ 궁극의 리스트 ‧ 전설의 땅 이야기(움베르토 에코 지음, 열린책들 펴냄)

by 서음인 2016. 6. 1.

1. 설명이 필요 없는 세계적인 석학이자 숀 코너리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한 소설『장미의 이름』의 저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 )는 그림과 텍스트로 가득 찬 매혹적인 두 권의 책『미의 역사』와『추의 역사』에서 수많은 미술작품과 다양한 문헌들을 인용해가며 서양에서 미와 추(美와 醜)라는 개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또 다른 매혹적인 책들인『궁극의 리스트』와『전설의 땅 이야기』에서는 서양인들에게 친숙한 여러 문학과 예술작품들에 등장하는 수많은 ‘목록들’과 ‘전설의 땅’들을 다루면서 그 안에 담긴 당대인들의 세계관과 욕망을 흥미롭게 드러내 보여 준다. 

2. 그러나 혹시 미술사나 미학에 대한 명료한 지식의 체계를 얻기 원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이 책들보다는 차라리 잘 알려진 몇몇 서양미술사 교과서들이나 함께 읽었던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시리즈를 고르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 될 것 같다. 에코의 이 책들은 뚜렷한 관점을 가진 저자가 통일된 시점으로 일관되게 서술해가는 교과서 내지 개론서 스타일이라기보다는, 느슨한 분류 아래 묶인 다채롭고 현란한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서로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요리로 표현하자면 잘 계획된 풀코스 정찬이라기보다는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는 다양한 음식이 가득 차려진 뷔페식이라고 해야 할까?

3. 각 권마다 400여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두툼한 책들의 내용을 제대로 요약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에코의 결론은 간단하다. 『미의 역사』와『추의 역사』에서 에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미와 추의 개념은 영속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현재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이진숙에 의하면 이 변화는 “진선미의 견고한 연대, 질서와 조화라는 고전적 미의 이상이 점차로 흐려지는 과정”이자 “미의 영역이 추를 끌어안으며 확장되면서 추의 영역이 미를 밀어내고 전면화하는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다(추는 미의 다른 얼굴이다, 『위대한 미술책』). 또한 분류할 수 없는 것들의 무한한 목록을 수집된 자료를 통해 통째로 제시하는『궁극의 리스트』와 서구인들의 마음속에 존재해 왔던 수많은 상상속의 유토피아를 다양한 그림과 텍스트를 통해 나열하는『전설의 땅 이야기』의 서술방식은 그 자체로 특정한 이상에 근거해 사물의 우열을 나누어 서열화하는 전통적인 서구의 사고체계가 포스트모던의 정신이 지배하는 오늘날 더 이상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저자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4. 결국 이 책들은 모든 사물을 자신의 방식에 따라 이름붙이고 위계를 세우며 자신이 알고 있는 의미의 체계 바깥에 존재하는 생소한 것들을 모두 비정상 ‧ 좌파 ‧ 추 ‧ 불경 ‧ 이단과 같은 단어로 규정해버리는 ‘정통적’ 혹은 ‘교과서적’ 정신에 일침을 가하는 책이자, 에라스뮈스와 하위징아가 강조했던 유희의 정신 즉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의 계보에 속하며 그 정신을 잘 보여주는 책들이라고 할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들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안에서 대단한 지식이나 체계적 법칙을 찾으려고 억지로 노력하기 보다는(앞에서 말한 대로 특정한 관점에 따른 ‘통합된 지식의 체계’를 원한다면 더 좋은 책들이 많이 있다), 간략한 설명과 함께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하고 풍성한 그림과 텍스트를 기쁘게 소비하면서 그 다채로움을 즐기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적인 눈으로 피조계의 삼라만상과 역사의 과정을 세세히 들여다보면 진지하고 숨막히는 ‘일관성'과 ‘합목적성’보다는 오히려 ‘우연’과 ‘낭비’와 ‘유희’와 같은 단어들이 하나님의 섭리가 펼쳐지는 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불완전한 인간이 만드는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독점된 ‘유일한 목적’ 과 ‘통일된 진리’ 그리고 ‘국정화’ 같은 용어들이야말로 사탄의 질서에 속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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