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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예술/미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다케히사 유메지 지음, 정은문고 펴냄)

by 서음인 2018. 3. 24.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는 20세기 초 일본 다이쇼 시대의 낭만적인 예술적 흐름을 일컫는 ‘다이쇼 로망’을 대표하는 예술가였던 다케히사 유메지(1884~1934)의 그림과 단상을 담고 있는 작고 예쁜 책이다. 1부인 “사랑하고”에서는 특유의 ‘유메지식 미인도’에 세 여성과의 격렬하지만 순탄치 않았던 사랑의 감정을 경구와 단상의 형태로 덧붙였으며, 2부 “여행하고”에서는 1931년에서 1933년까지 2년여의 미국 및 유럽 여행에서 느낀 인상들을 간단한 스케치와 함께 모았다. 관능적인 미인도에 덧붙여진 사랑에 대한 짧지만 섬세한 경구와, 여행지에서의 찰나를 잘 담아낸 스케치와 단상에는 이 예술가의 탁월한 감성이 잘 묻어나 있다.



그가 뜨겁게 사랑했던 세 여인을 모델로 삼았다는 ‘유메지식 미인도’를 보며 세기말 아르누보의 장식적이고 몽환적이며 관능적인 양식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알고 보니 유메지는 아르누보의 주요 흐름인 '미술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장정이나 디자인, 염색, 인형에 이르기까지 순수예술과 상업예술을 넘나드는 수많은 작업에 활발히 참여했으며, 그의 유럽행 역시 일본에 미술공예운동을 퍼뜨리기 위해 세운 ‘하루나 산 산업미술학교’를 위한 시찰의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꼼꼼하면서도 아름다운' 번역서의 만듦새 역시 저자가 추구했던 아르누보와 미술공예운동의 정신을 잘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몸도 마음도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자유인”이자 평화와 평등을 지지하는 박애주의자였고 철저하게 사랑과 아름다움을 추구한 로멘티스트로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대공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국주의의 길로 접어든 시대와의 불화로 철저히 잊혀진 채 숲속의 한 요양소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는 유메지의 인생은, 마치 몽환적이고 관능적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그의 미인도를 닮았다. 윌리엄 모리스나 알폰스 무하, 구스타프 클림트같은 아르 누보 예술가들을 좋아했던 내게 이 예술가의 발견은 또하나의 선물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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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덮으니 젋은 시절 읽었던 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떠오른다. 가지고 있는 책이 세로 조판일 만큼 오래 전에 읽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시간이 지나도 뇌리에서 잘 떠나질 않는 구절들이다. 유메지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우리도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시대에도 사람들은 사랑했을까” 
남자는 그 물음에도 여전히 대답은 없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여자도 선다. 남자가 두 손으로 여자의 팔을 잡는다.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신기한 보물을 사랑스럽게 즐기듯.
“깡통. 말이라고 해? 끔찍한 소릴? 부지런히 사랑했을 거야. 미치도록. 그 밖에 뭘 할 수 있었겠어?” (최인훈 지음,  『구운몽』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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