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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철학

한나 아렌트의 말 (한나 아렌트 지음, 마음산책 펴냄)

by 서음인 2016. 6. 3.

요약 

이 책은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인간의 조건> 과 같은 난해한 책들로 잘 알려진 유대게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생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된 대담집입니다. 

특별히 아렌트가 이 책에서 "악의 평범성 혹은 진부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악이란 정상인에게 덧붙여진 심오하거나 특별한 '마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무엇인가가 '결핍'된 진부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된다는 것입니다. 즉 악은 창조적인 '마성'이 아닌 진부한(허접한) '결핍'에 의해 발생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아렌트에게 악을 일으키는 결핍이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기의 무능력,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의 무능력, 스스로 생각하기의 무능력”이었습니다. 아마도 "비공감, 불관용, 무개념, 무사고"같은 단어들이 이 악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원 리뷰글


1.『한나 아렌트의 말』은『전체주의의 기원』『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인간의 조건』과 같은 저술들로 잘 알려져 있는 독일 출신의 유대계 미국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생전에 했던 네 편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이 대화록에서 아렌트는 난해하기로 소문난 그녀의 책에 담긴 생각들을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아렌트의 목소리를 좀더 친근하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아렌트의 숨결이 깃든 대화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 외에 여성신문사에서 나온 평전인『한나 아렌트』(알로이스 프린츠 지음, 김경연 옮김) 가 이 20세기를 대표한다는 정치사상가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2. 이 책에서 아렌트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악의 평범성 혹은 진부성(the banality of evil) 이라는 논쟁적인 개념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말했다는 다까끼 마사오와 그 딸을 숭배하며 '어버이'를 참칭하는 단체를 통해 시위에 참여하거나 '일베'라 불리며 키보드 앞에서 매일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일군의 무리들이 사실은 사악한 마성을 가진 악의 화신들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멍청하고 진부한 인간계의 폐물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종류의 '진부한' 인간 페물들이야말로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절대악’인 히틀러나 스탈린 치하의 전체주의 체제를 만들고 지탱했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3. 그들이 저질렀던 혹은 저지르고 있는 극악한 죄란 다름 아닌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기의 무능력,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의 무능력, 스스로 생각하기의 무능력”이며, 우리는 무능과 결핍으로 인해 끝없이 사악해져버린 '폭민'이라 불리는 이러한 인간계의 '폐물'들을 특별한 마성을 지닌 악의 화신인 양 ‘높여’ 주어서는 안된다. 아렌트의 말마따나 “악은 언제나 극단적일 뿐 급진적은 아니며 .... 깊이가 없으며 또한 마성도 없을" 뿐 아니라 “악이 전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버섯처럼 표피에서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이지만,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선이며 언제나 선만이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4. 이 책을 읽다 보니 오늘의 한국이야말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진부한 악'이라는 개념이 가장 잘 들어맞는 사회인 것 같다. 주말마다 서울역앞 광장을 점령한 채 증오로 가득한 목소리와 몸짓으로 폭력을 선동하는 "태극기를 도둑질한" 천박한 무리들과, 근엄한 표정과 목소리로 하루라도 소수자를 혐오하는 언사를 내뱉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무식하고 교만한 21세기의 바리새인들이야말로, 악이 얼마나 진부한(즉 허접한) 얼굴을 가졌는지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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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영역으로 향하는 모험 “인간성은 혼자 힘으로는 절대 획득되지 않으며, 누군가 자신의 작업을 대중에게 바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성은 자신의 삶과 존재 자체를 공공 영역으로 향하는 모험(venture of the public realm)에 바친 사람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 내게 공공 영역으로 향하는 모험이란 한 사람이 개인으로서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거죠. 나는 사람은 그가 보여주는 모든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요. 말하기도 행위의 한 형태에요. 그게 하나의 모험이죠 ..... ‘우리’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는 것!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 우리는 어떤 범죄자를 떠올릴 때 범행 동기가 있는 사람을 상상해요. 그런데 아이히만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무런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행 동기라고 이해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죠. 그는 남에게 동조하기를 원했어요. 그는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 했는데, ‘나머지 사람에게 동조하기’와 ‘우리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극악한 범죄가 자행되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제거되어 있었어요. 당신이 거기서 얻는 것은 그저 관성대로 굴러가기(freewheeling)일 뿐이죠. 이런 단순한 기능에서 얻는 쾌감이 아이히만에게서 꽤나 눈에 띄었어요. 그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은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gentleman)가 되는 것이죠.


악의 평범성 혹은 진부성(the banality of evil)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에요! ...... 아이히만은 완전히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진부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에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 다른 모든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 ..... 순종을 이상화하는 이 정신 나간 사고방식 .....


악의 평범성 혹은 진부성 II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의도 중 하나는 악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깨뜨리고, 사람들이 리처드 3세 같은 엄청난 악인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걷어내는 것이었어요. 브레히트에게서 이런 문장을 찾아냈어요. “정치범들은 사람들 앞에, 특히 폭소 앞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들은 거물 정치범들이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로,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 그는 이렇게 말했죠 “히틀러가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그가 벌인 일의 규모가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즉 멍청이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란 이야기죠.


무엇이 악인가? (질문) 아이히만 같은 유형은 여전히 전통적인 개념의 살인자에 속할까요? 그는 살인자라기보다는 살인을 일삼는 조직체의 부속품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아렌트) 책상에 앉아서 또는 대중 속에서 저지르는 이런 살인에 관해 말하라면 ...... 그건 물론 일반적인 살인자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무시무시한 인간형이에요. 자신에게 당하는 피해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정말로 파리 잡듯 사람을 죽이는 거죠 ...... 아이히만은 사람을 실제로 죽이는 업무를 부여받지는 않았어요. 그는 그런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살인 절차의 일부였어요! 내가 뜻하는 바는 그가 끝없이 악한 존재라는 거예요. 우리가 범죄 본능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거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에요 .......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책임 범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의 정도는 자신의 두 손으로 치명적인 살해 도구를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증가한다.”


제3 세계는 이데올로기다! 나는 제3 세계는 이데올로기 아니면 환상이라고 생각해요. 아시아와 남미는 실제로서 존재해요. 이 지역들을 유럽 그리고 미국과 비교해보면 저개발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고, 당신은 그 점 때문에 그게 이 나라들 사이의 중요한 공통분모라고 주장할 거에요.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공유하지 않는 무수히 많은 것들을 간과하고, 그들이 공유하는 게 다른 세계와 대비될 때만 존재하는 차이점일 뿐이라는 사실을 놓치죠. ‘저개발’이라는 아이디어를 중요한 요소로 보는 그러한 관점은 유럽인과 미국인이 가진 편견이에요 ...... 뉴 레프트는 올드 레프트의 무기고에서 제3 세계라는 표어를 빌려왔어요. 제국주의자들이 다른 모든 차이점을 무시해버리는 것을 뉴 레프트가 레이블만 뒤집어 다는 식으로 복제한 거에요. 이건 노상 하는 이야기에요. 모든 표어에 곧이곧대로 속아 넘어가는 것, 사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나 현상을 실제 그대로 보기를 꺼리는 것, 현상을 마땅히 분류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현상마다 알맞은 범주를 적용하지 않는 것 등.....


전체주의의 독특성 (히틀러와 스탈린에게서 구현된) 전체주의적 독재 정권은 단순한 독재 정권이 아니고 단순한 전제 정권도 아니에요. 무고한, 죄를 지은 적이 없는 희생자 역할이 그 특징이죠.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살던 사람들은 무슨 짓을 저질러서 강제로 추방당하거나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역동성에 따라 각자의 역할이 주어졌고(예를 들면 “열등 인종” 혹은 “인민의 적”), 그러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와 상관없이 그 역할을 수행해야 했어요. 이 점과 관련해 이전의 어떤 정부도 “예”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았어요. 어떤 정부가 또는 어떤 폭군들이 사람을 죽인 것은 대체로 “아니요”라고 말했다는 이유에서였죠 ....... 히틀러는 유대인과 집시를 그의 의견에 동의할 권리로부터 차단했고, 스탈린은 누가 됐건 “예”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요”하고 말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기를 열렬히 추중하는 지지자들의 머리조차 자른 유일한 독재자에요.


‘생각하지 않기’의 위험함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에요. 실제로 모든 사유는 엄격한 법칙, 일반적인 확신 등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기반을 약화시켜요. 사유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비판적으로 검토할 대상이 돼요. 즉,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위험천만한 사유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아요 ...... 사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나는 사유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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