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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철학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 (진중권 지음, 창비 펴냄)

by 서음인 2017. 4. 30.

진중권의 테크노 인문학의 구상창작과 비평이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공부의 시대라는 특강에서 저자가 문자문화의 종언이 가져온 위기 속에서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강연한 내용을 엮어 낸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이 더 이상 근대적 문자문화의 패러다임 안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영상적 의식구술적 의식이 주도하는 디지털 시대에 발맞춰 사운드와 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재정의하고, 상상력과 유희성을 바탕으로 세계의 제작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세계의 제작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우리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되어버린 디지털 시대와 그 속에서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탁월한 성찰을,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명쾌하고 알기 쉽게 요약해내는 진중권의 황금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특별히 디지털 시대의 기독교 신학에게도 흥미로운 시사점들을 많이 줄 수 있을 것 같다.

인문학의 위기   철학 혹은 인문학의 위기는 비단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지식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던 철학(philosophia)은 지식의 분업에 따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여타 인문학의 제 분야와 결별한 끝에 20세기에 들어서는 언어분석의 영역으로 움츠러들고 말았다. 또한 실용적 활동에서 벗어나 정신의 눈으로 조용히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관조를 의미했던 테오리아(theoria)는 순수한 지식이라는 성격을 잃은 채 세속화하여 이론이 되더니 현재는 제작의 노하우와 동일시되는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문자문화의 종언과 디지털 문화의 등장   이러한 인문학의 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정보 전달의 플랫폼이 책(문자)에서 디지털 미디어(영상)으로 바뀐 것이다. ‘구텐베르크 은하의 종언이라는 마샬 맥루언의 말이 잘 요약하고 있는 것처럼 근대 이후 세계를 지배했던 문자문화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디지털 문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문자문화 이전에 사람들을 지배했던 영상적 의식과 구술적 의식(신화적, 설화적, 동화적 의식) 이 첨단 IT 기술과 결합된 형태로 다시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성적 합리적 사고와 선형적 시간관념에 따른 역사주의적 의식, 그리고 계몽이라는 문자세대의 역사적 의식이 약화된 자리를, 역사의 기술이 스토리텔링으로(historystory) 역사의 교훈이 서사의 재미로 치환되며 참-거짓의 구도가 재미-지루함의 구도로 바뀐 젊은 세대의 서사적 의식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의 죽음’, ‘역사의 죽음’, ‘정치적인 것의 죽음등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담론들은 미디어 플랫폼의 변화가 야기한 이러한 의식구조의 변화가 철학적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언뜻 보기에는 과거로 회귀하는 정신적 퇴행으로 보이나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의식이 더 높은 차원으로 진화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 그렇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인문학을 계속할 것인가? (1)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미래의 인문학은 미디어 플랫폼의 변화에 대응하여 텍스트를 넘어 사운드와 이미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 사유란 어자피 언어적인 것이므로 텍스트(와 그 배후의 인문학)는 영상 문화의 시대에도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이제 인문학은 자신을 가시적인 이미지나 사운드의 배후에 존재하는 일종의 스크립트’(script)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내용적 측면에서는 현재의 인문학이 과거처럼 텍스트가 아니라 사운드와 이미지 위에 서 있는 디지털 시대에 새로이 제기되는 인문학적 물음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세대가 살아가는 디지털 생활세계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물음을 찾아내 적극적으로 대답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미디어적 전회와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 그간 인문학에는 수 차례의 패러다임 전환이 있었으며 세계의 본질에 대해 직접 질문하는 고전 철학의 존재론(ontology)에서 세계의 인식에 사용되는 정신과 의식을 묻는 근대의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를 지나 의식 자체가 언어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20세기의 언어학적 전회(linguistic turn)를 거쳐 현재는 세계가 의식에 주어지거나 언어로 구조화되기 보다는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미디어적 전회(medial turn) 혹은 도상적 전회(iconic turn)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렇게 미디어적 전회를 맞이한 디지털 시대의 인문학이 새롭게 다뤄야 할 내용주제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현실의 본질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다루는 디지털의 존재론(ontology) 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과거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요구되는 인간형은 어떤 것인가를 다루는 디지털의 인간학(anthropology)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를 다루는 디지털의 사회학(sociology)으로 정리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존재론 파타피직스 디지털 시대 존재론의 핵심은 파타피직스(pataphysics)로서 과학적 철학적 논리적 사고방식에 시적 환상으로서의 판타지를 결합한 사고방식을 일컫는다. 현대 세계는 근대 합리주의 시대 이후 분리되었던 가상과 현실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더불어 다시 중첩되면서 가상현실(VR) 과 증강현실(AR)이라는 두 현실이 물리적 현실과 혼재된 파타피지컬한 상태로 변화하고 있으며, 인간 역시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가상도 재미만 있으면 얼마든지 현실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파타피지컬한 종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요구되는 핵심적인 과제는 디지털 가상과 아날로그 현실을 성공적으로 중첩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은 기술이 아닌 상상력이다.

디지털의 인간학 - 호모 루덴스의 귀환 중세 시대까지 유희인(homo ludens)이었던 인간은 근대에 접어들며 데카르트의 지성인(homo sapiens)에서 막스 베버의 직업인 (Berufsmensche)를 거쳐 그 둘이 합류하는 경제인 (homo economicus)로 변모해 왔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는 이미 있는 것을 연구하는 능력이 아니라 아직 없는 것을 표상하는 능력이 중요해지며, 이는 근대 이후 정보를 문자숫자코드(alpha-numeric code)로 저장 가공 전달하는 능력을 가지고 지식권력(savoir-pouvoir)을 휘둘렀던 호모 사피엔스에 밀려 사라진, 하위징아(Huizinga)가 말한 유희형 인간(homo ludens)이 전면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자본주의의 성격이 산업혁명 이후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생산자본주의와 1950년대 이후의 소비자본주의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더불어 사용가치가 아닌 차이의 기호를 소비하는 기호자본주의(semio-capitalism) 사용가치가 아닌 디자인을 소비하는 미적 자본주의(aesthetic capitalism) 유희자 체험(player experience)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에서 잘 나타나듯 노동과 유희의 경계가 불명확해지는 유희자본주의(ludo-capitalism)의 형태로 변화하면서 놀 줄 아는호모 루덴스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디지털의 사회학 -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이러한 자본주의의 변화는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의 양상, 특히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 자체가 비트와 아톰이 중첩되고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며 노동과 유희가 중첩되는 파타피지컬한 세계로 변하면서 노동과 유희를 더한 플레이버(playbor) 나 인지노동자(cognitariat) 감정노동자(emotariat)와 같은 새로운 노동자 계층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이 유희가 되고 생산이 예술이 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이 자본주의적으로 실현된 것이지만(유토피아), 전통적인 자본-임노동의 관계가 노동자의 육체와 정신 뿐 아니라 감정으로까지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디스토피아) 

테크노 인문학 - 세계의 제작학 우리는 창의성을 지닌 미학적 유희적 인간이 되라는 요구가 자본주의의 정언명령이 된 이 새로운 상황 가운데서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인문학, 즉 테크놀로지와 연동된 미래학적 성격의 인문학이다. 구조주의 운동은 인문학이 그 자신 안에 공학적 프레임을 받아들이려는 과정이자, 전통적 인문학이 테크노 인문학으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문학이 공학적 프레임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던 인문학이 이제 부분적으로 세계의 제작에도 참여하는 세계의 제작학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문학의 세계제작은 세계의 제작에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인간을 상수로 놓고 기계를 변수로 가정하는 정보혁명의 인터페이스 제작을 위한 인간이해를 제공하며 인공지능과 같은 인간의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를 위한 과학 실험에 모델을 제공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빌림 플루세르는 디지털 시대에 순수 인문학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집단은 일종의 수도원에 고립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록 공부를 업으로 하는 학자가 아니지만 디지털 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전형적으로 문자세대에 속한 글중독자인 나는 남은 여생을 이 수도원에 갇힌 채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기독교인으로서 지금까지 익숙했던 정통신학의 명제적진리주장뿐 아니라 성서에 대한 서사적이해에도 전혀 거부감이 없어진 것을 보니 나는 이미 이 수도원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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