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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인문/역사

NL 현대사 - 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박찬수 지음, 인물과 사상사 펴냄)

by 서음인 2018. 4. 14.

1986년 김영환이 작성한 팸플릿인 ‘강철서신’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고 반미’와 ‘통일’을 전면에 내세운 대중적 학생조직인 ‘구국학생연맹(구학련)’을 통해 확산되기 시작한 NL(National Liberation) 사조는 지난 30년간 변혁운동의 주류였을 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반공이데올로기와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들이 엄존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NL은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입에 담기 조심스러운 ‘뜨거운 감자’이기도 하다. 『한겨레』논설실장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고 지금도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운동사조인 NL의 공과를 누구도 공개적으로 말하려 하지 않기에 물꼬를 튼다는 생각으로 “내가 알고 있는 작은 단면들”을 보여주면서 “불충분한 윤곽”이라도 빨리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강고했던 전국조직이 대체 왜 불과 몇 년 만에 무너졌는지, 1900년대 학생운동의 퇴조와 통일운동의 협소화에 NL은 어떤 책임이 있는지 한번 쯤 돌아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주류인 586세대에게 큰 영향을 끼친 변혁운동의 흥망성쇠와 이 운동을 이끌었던 중심 인물들의 어제와 오늘을 생생하게 그려낸 흥미진진한 책이다. 관련 내용 중 일부를 요약하고 짧은 단상을 덧붙이기로 한다.

 

NL의 세 기둥   복잡하고 중층적인 NL이라는 사조를 하나로 묶은 세 기둥은 민족주의, 대중노선, 품성론이었다. (1) ‘반미’와 ‘통일’ 그리고 ‘자주’와 ‘민족’은 NL 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용어들였다. ‘계급’보다 ‘민족’을 앞세운 NL은 사람들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강하게 자극했으며, 민족주의는 NL 사조에 강한 파급력과 생명력을 불어넣은 중요한 기둥이었다. (2) 정치력이 있고 유연했던 NL은 대중추수주의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투쟁수위와 방법, 슬로건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췄다. 이러한 대중노선은 1987년 6월 항쟁 과정에서 학생운동이 일반 시민의 민주화 열기와 성공적으로 결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3) 혁명이론보다 운동가의 의리와 헌신을 강조하는 품성론은 ‘전위조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회의하던 현장 활동가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냈고, NL 사조가 노동 운동권을 포함한 진보 운동권 전체에 급속히 퍼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혁명사조로서의 NL이 대중적으로 세력을 확산하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음에도 비교적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86년 처음 등장할 때 강렬한 인상을 준 이 세 가지 특징이 NL 주변을 두텁게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NL과 ‘주사파’   1994년 서강대 박홍 총장의 발언으로 ‘NL=주사파’라는 인식이 일반 국민들에게 각인되었지만 실제로 남한 운동권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철학과 사상으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혁명이론보다 의리와 헌신, 성실함 같은 운동가의 올바른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품성론’이었다. 그러나 품성론만으로는 주체사상의 정수를 받아들였다고 할 수 없었으며, 수령과 후계자의 유일한 영도를 받아들일 것인지, 북한 노동당을 남한 변혁운동의 지도부로 인정할 것인지가 NL 내부에서 ‘주사’와 ‘비주사’를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넓은 의미의 민족 문제에 대한 각성과 그걸 풀어가기 위한 전략전술과 통일 염원이라는 정서와 논리까지 폭넓게 주사에 포함시킨다면 주사파가 NL 운동권의 다수라고 할 수 있었지만, 북한 노동당과 김정일을 추종하고 주체사상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사람으로 한정한다면 그건 소수였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   NL의 사회구성체론인 ‘식민지반봉건사회론(식반론)’은 한국사회가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 일제 시대와 다르지 않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라고 주장했다. 나중에는 NL 스스로도 ‘식민지반자본주의론’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정도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식반론’이 힘을 발휘한 이유는, 한국사회가 미국의 경제 ‧ 군사적 이익에 종속되어 자본주의 발전이 차단되고 민주주의 실현도 막혀 버렸기에 반미 자주화 투쟁을 민주화 투쟁과 함께 전면에 내세워야 하며 그 주체는 노동자뿐 아니라 학생과 농민, 소상공인, 소시민, 민족자본가까지 모두 포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식반론의 주장이, 실천적으로 반미-통일의 민족주의 경향과 맥을 같이하면서 당시 운동의 방향과 과제를 설정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레닌의 이론을 쫒아 노동계급 중심의 혁명을 꿈꾸던 PD 그룹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였다.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다현사)”는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놓고 우리 현대사를 자주와 통일의 관점에서 쉽고 단순명료하게 설명한 책으로 처음부터 NL의 확산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이 뚜렷했으며, 1980년대의 학생들이 “해방전후사의 인식(해전)”을 의식화의 필독서로 삼았다면 NL의 교과서는 “다현사”였다.

 

서클의 해체와 그 공과   NL은 서클주의를 청산하고 운동의 헌신성만으로 무장한 새로운 단일 학생조직인 RMO(혁명적 대중조직)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위해 수십 년간 학생운동의 본거지였던 서클을 해체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리고 1985년 말에서 1986년 초에 이르기까지 학내의 모든 서클이 자진 해산하면서, NL은 운동의 주도권을 확실히 틀어쥘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 운동가들의 근거지요 재생산기지였던 서클의 해체는 학생운동의 재생산구조를 무너뜨려 결과적으로 학생운동의 급속한 몰락을 가져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운동조직이었던 서클의 해체 후 이를 대신한 전대협이나 한총련 같은 NL 조직들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었으며, 이렇게 일사분란함과 목표만 중시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권위를 강조하는 조직이 오래 갈 수는 없었다.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    1989년 3월 한양대 학생회간 한켠에 사무실을 마련한 것은 전대협 위상의 질적 도약을 예고하는 상징과 같았다. 이후 수년간 전대협은 통일운동과 반정부 투쟁을 주도하며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89년 6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한학생 대표를 파견했고, 1991년 5월 민자당 창당 반대 거리시위에는 전국에서 약 10만 명의 학생을 조직적으로 동원했다. ‘구국의 강철대오’는 전대협을 상징하는 구호가 되었다. 3기 전대협 의장을 한양대 총학생회장이 맡은 것은 학생운동이 서울 명문대의 소수 엘리트 서클 중심에서 벗어나 학생회라는 대중조직 중심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학번 체계나 학교 서열 대신 의장과 지도부를 중심으로 모든 일을 꾸미고 실행하는 단일한 집행력과 일반 학생들의 헌신적 태도가 학생운동의 전성기를 일구어냈다. 호감을 주는 외모와 성격을 지니고 수개월간 경찰 수배를 피해 종횡무진 활약한 임종석 의장 개인의 능력도 한몫했다. 전성기 전대협은 1990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여당과 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오르기도 했다.

 

NL의 퇴조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1년 분신정국과 강경대 사망사건을 정점으로 영향력이 꺾였고, 1996년 한총련의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급격히 퇴조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과 신세대나 X-세대의 등장으로 대학가 분위기가 바뀜에도 불구하고 정책위원회로 대표되는 이념 지향성이 강한 학생운동 활동가 그룹이 대중조직인 전대협과 한총련을 주도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졌으며, 이러한 괴리는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범민족대회와 통일대축전 행사를 열려던 학생들과 경찰이 9일간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전경 1명이 사망한 ‘연세대 사태’를 통해 대폭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학생운동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음에도 운동권 내부에서는 제대로 된 평가나 반성이 나오지 않았으며, NL이 주도하는 한청련은 외연을 확장하는 게 아니라 의문을 제기하는 학생들을 배제해서 ‘사상의 순결성’을 지키려 했다. NL의 성공은 대중노선 때문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엔 대중은 사라지고 교조적 이념만 남았다.

 

민노당과 NL-PD   한국전쟁 이후 가장 영향력 있고 대중적인 진보정당이었던 민노당(과 통진당) 12년은 내부적으로 NL-PD의 정파 갈등의 역사였다. 둘의 화학적 결합을 가로막은 것은 이념적으로는 북한 문제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두 계파의 몸에 밴 행동양식과 조직문화의 차이가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집단주의와 가부장제의 정서가 강하고 인간적 의리와 연공서열을 우선하는 한국의 전통 규범을 그대로 반영한 NL의 조직문화와 개인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평등문화 등 후기산업사회의 가치를 중시하는 PD의 문화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기 힘들었다. 숱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1986년 이후 NL이 진보진영의 다수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NL 조직문화가 한국사회의 DNA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유일사상, 위계질서, 신념과 의리를 중시하는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내세웠던 NL은 아예 이러한 자신들의 조직문화를 이론적으로 정당화시켜 버렸으며(품성론), 비판이나 토론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목표가 방법보다 더 중요하다는 자기확신을 특징으로 가지게 된 NL의 조직 문화나 규율은 대중정당에 잘 맞지 않는 측면이 많았다.

 

경기동부연합    1990년 중반부터 조직력과 대중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NL 진영에서 두각을 나타낸 경기동부연합은 결집력과 실천력에서만큼은 NL 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한때 성남 중원 국회의원 선거를 포함한 대중운동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당원명단을 북한에 넘긴 일심회 관련자 2명을 제명하는 문제로 PD계와의 분당사태가 벌어지면서 경기동부연합은 ‘민노당 NL의 배후조직’ 또는 ‘종북 주사파의 핵심’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경직되었다 싶을 정도의 규율을 가졌지만 외부 활동에서는 대중의 요구를 앞에 놓고 유연하게 움직인 것이 경기동부의 장점이었으나, 불과 10여 년 뒤 유연성을 상실하고 가장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정파로 바뀐 것이다. 민노당(과 통진당)은 대중정당을 지향했고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 성장했지만, 경기동부는 그런 대중정당의 정파로서 적응하는데 실패했다. 당내 핵심 인사들도 누군지 알지 못할 정도로 배후에서만 일해 온 막후 실세(이석기 전 의원)가 어느 날 갑자기 정당의 간판 국회의원으로 떠오르는 것은 대중정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체 당원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정당에 표를 던지 수많은 일반 유권자의 요구를 강고한 조직력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만한 착각이었다.

 

민혁당   북한의 반잠수정을 타고 월북했던 ‘강철서신’의 김영환과 하영옥이 중심이 되어 1992년에 설립한 민혁당은 반제청년동맹(반청)이라는 기존 조직을 당 형태로 전환한 것으로 인간중심의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고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NL-PDR)를 채택한 해방 후 남한에서 결성된 북한과 연결된 가장 큰 규모의 자생적 전위당이었다. 민혁당은 당시 전성기를 맞았던 학생운동을 지도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학생운동권 밖의 재야운동단체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북한은 민혁당 외에도 여러 개의 지하당을 남한에 건설하려 애를 썼고 이런 지하당을 중심으로 남한혁명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1990년대의 한국은 이미 전위조직을 주축으로 한 비합법 혁명운동이 불가능한 사회였으며, 그런 면에서 민혁당은 지하당 노선의 최대 성과이자 분명한 한계였다.

 

김영환의 전향    1996년 봄 민청련 기관지인 자주의 길 2호에 실린 기고 <세상이 바뀌면 시대정신도 바뀌어야 한다>에서 남한에 NL 운동을 확산시킨 민혁당 최고위원 ‘강철’ 김영환은 박정희식 근대화에 대한 긍정적 반응과 국가보안법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통해 운동방식의 변화가 아닌 ‘NL 노선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 후 김영환은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민노당 전북위원회의 대다수와 함께 전향하여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 정권 타도“와 ’북한 민중 해방‘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2000년대 들어 우리 사회에 숱한 논란을 불러온 북한민주화운동이나 뉴라이트 그룹의 태동되는 계기가 되었다.

 

뉴라이트의 흥기와 쇠퇴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가 출신, 그중에서도 특히 NL 전향파를 중심으로 2004년 11월 출범한 ‘자유주의연대’는 NL 전향파가 한국 보수주의 운동의 전면에 나서겠다는 선언과 다름없었다. 자유주의 연대의 출발점은 1998년 11월 민혁당 사건 핵심인 김영환과 홍진표, 노동운동가 출신 한기홍이 중심이 되어 창간한 격월간지인 “시대정신”이었다. 처음에 시대정신의 창간 멤버들은 박정희 시대의 국가주의 보수와 분명히 선을 긋고 기업과 시장의 자유를 믿는 자유주의를 내세웠으나, 2006년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 등의 주도로 계간지로 재창간 하면서 본격적으로 보수화되기 시작했다. NL 전향파가 분명하게 오른쪽으로 자리 잡은 것은 2002년 대선이 계기였으며, 이명박 정권하에서 ‘신보수’를 표방한 ‘뉴라이트’는 NL 전향파의 빛깔 좋은 이념적 배경이었다. 그러나 뉴라이트 운동은 친이명박 운동으로 알려지고 친일파와 독재찬양이라는 현대사 문제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극우 이미지가 덧씌워지면서 급격하게 이미지가 하락했으며, 허현준이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사태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추락의 결정타를 맞게 된다.

 

한때 그렇게도 강고했던 NL 학생운동과, 한때 성공가도를 달리던 경기동부는 왜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을까? 그리고 주사파의 원조이던 김영환이나 극좌의 상징이었던 김문수는 왜 오늘날 수구세력의 잔당으로 변신했을까?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채 유연성을 잃고 자신들의 도그마에 갇혀 버렸거나, 길을 잃고 방황하다 결국 자신들이 그렇게도 극복하기를 열망하던 과거로의 퇴행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닐까? 변화란 어렵고 두렵다. 그러나 ‘변화’가 아닌 ‘고착’이나 ‘퇴행’을 선택하는 자들의 미래는 예외 없이 저들처럼 시대에 뒤쳐진 ‘화석화된 꼰대’다. 과연 내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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