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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예술/음악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마티 펴냄)

by 서음인 2016. 5. 29.

1. 영국의 저명한 음악평론가인 저자 노만 레브레히트는 이 책에서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던 1902년 카루소의 녹음에서 시작하여 찬란한 영광의 시절을 지나 크로스오버 음반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동안 클래식 음반산업이라는 하나의 위대한 문명을 만들어 왔던 전설적인 음악가들과 프로듀서들 그리고 음반사들과 관련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세상에 태어난, 레코딩의 역사를 바꿀 만한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거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세상과 음악을 바꾼 100장의 ‘좋은’ 음반과, 좋은 의도로 기획되고 최고의 음악가들이 참여했지만 형편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 20장의 ‘나쁜’ 음반들을 소개한다.

2. 저자에 의하면 실황연주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음악 행위인 녹음은 음악 문화가 시작된 후 최초로 정확성과 속도를 예술적 영감보다 더 중요한 연주 목표로 만들었으며, 서로 다른 음악가의 음악을 비교할 수 있게 함으로서 경쟁이라는 낮선 요소를 음악에 도입했다. 또한 수없이 쏟아진 클래식 음반들은 과거 부유층의 산물이었던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특정한 음악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20세기 중반의 말러 붐에서 나타나듯 대중들의 클래식 음악 선호도를 바꾸기도 했다. 이러한 클래식 음반산업은 카라얀이나 번스타인, 솔티나 굴드와 같이 레코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잘 활용했던 탁월한 예술가들과 DG 의 엘자 실러나 EMI 의 월터 레그, DECCA 의 존 컬쇼와 같은 전설적인 음반 프로듀서들의 활약에 힘입어 그 전성기에 도달했다.

3,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클래식 음반산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러한 거장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 (1) 독과점체제 하에 창조성을 잃은 채 서로의 기획을 베끼기에 급급했던 제작자들 (2) 기업화된 메이저 음반사들에 의해 자행되는, 더 이상 돈벌이가 되지 않는 클래식 음반 부문에 대한 과감한 감축 (3) 카라얀 시대부터 시작된 비슷한 음반들의 과잉 중복제작 (4) 시간에 따른 음질의 변화가 거의 없는 반영구적 매체인 CD 의 등장 (5) CBS를 인수한 후 허영심에 사로잡혀 과잉투자와 제작을 통해 클래식 음반계에 타격을 입힌 SONY 의 판단착오 (6)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인터넷과 다른 매체들의 탄생과 같은 내부적 외부적 요인들로 인해, 오늘날 클래식 음반이라는 하나의 예술 형식은 마침내 그 종착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 책은  저물어가는 이 문명을 그냥 보낼 수 없었던 저자가 클래식 음반계에 바치는 마지막 헌사, 또는 조의라 할 수 있다.

4. 젊은 시절부터 거의 음반을 통해서만 클래식 음악을 접해 왔던 내게 바로 그 클래식 음반산업의 訃音을 알리는 이 책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그렇게 많은 전설적 천재들이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휘하던 창조적인 예술영역이 한낱 연예인들의 인기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맘몬의 힘에 밀려 빈사상태에 빠지다니! 그러나 저자의 말마따나 레코딩의 역사가 이제 저물고 있다면 이 위대한 문명의 마지막 길에 삼가 조의를 표하며 그 흔적으로 남겨진 유산이나마 잘 간수하는 것 외에 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오호통재(嗚呼痛哉)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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