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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예술/음악

거장 신화 - 클래식 음악의 종말과 권력을 추구한 위대한 지휘자들 (노만 레브레히트 지음, 펜타그램 펴냄)

by 서음인 2016. 5. 27.

1. 세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음악 평론가의 한 사람으로 클래식 음반계의 성장과 몰락과정을 다른 흥미진진한 책인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The Secret Life and Shameful Death of Classical Record Industry> 를 쓰기도 했던 노만 레브레히트는 800페이지가 넘는 이 묵직한 책 <거장 신화> 의 목적이 “지휘자가 갖는 권력의 기원과 본질,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의 지휘계의 쇠퇴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불과 120년 전까지만 해도 작곡가의 의도를 충실히 재현하는 겸손한 하인에 불과했던 지휘라는 직업이 어떻게 음악의 운명을 지휘하는 주인이자 현대 세계의 영웅으로 바뀌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영광의 절정에서 어떻게 급격한 쇠퇴와 위기로 치닫게 되는지를 근대적 지휘자의 원조격인 한스 폰 뵐로에서부터 지휘권력의 절정을 구가한 카라얀과 번스타인을 거쳐 현재 베를린 필의 수장인 사이먼 래틀에 이르기까지, 지휘라는 직업의 특성을 만드는 데 기여한 수많은 거장들의 궤적을 따라가며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2. 지휘자란 현대의 신화적 영웅이자 음악에 천상의 질서를 부여하는 창조자이다. “날카로운 귀, 첫 대면에서도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카리스마,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의지, 높은 구성력,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건강함, 거침없는 야심, 그리고 여기저기 박혀 있는 수천 개의 음표를 뚫고 예술의 핵심에 도달하는 자연스러운 질서 감각, 악보의 전체적인 개요를 파악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을 두루 갖춘 비범한 지휘자는 평범한 오케스트라로부터도 마법과 같은 소리를 뽑아내며, 숙련된 연주자들은 지휘자를 처음으로 대면한 순간 자신이 음악의 위대한 전달자와 함께인지 아니면 겉만 요란한 가짜와 함께인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한다. 저자에 의하면 19세기 중반 오케스트라만으로 연주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방대해진 악보를 연주하기 위해 생겨난 지휘라는 직업은 작곡가의 의도를 재현하는 충실한 대리인에서 점차 음악이라는 종교의 교주이자 제사장으로, 한 도시와 나라와 다국적 기업의 상징적 인물로, ‘영웅들의 영웅’이자 엘리트들의 우상으로, 마침내는 부와 권력의 화신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3. 그러나 저자는 지난 20여년 동안 유능한 지휘자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지휘대에 사이비 마에스트로들이 넘쳐나고 있으며, 과거의 위대한 지위자들이 보여 주던 깊이 있고 개성적인 음악 대신 피상적이고 천박한 해석이 넘쳐나고 있다고 우려한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의 ‘위대한 지휘자’는 그들이 연주하는 작품이 아닌 그들이 표상하는 신화에 의존하는 ‘신화적 영웅’으로 비음악적인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상업적 필요에 의해 유지되는 존재이며, 이제 지휘자의 존재 이유는 사람들이 지도자로 여기는 상징적 인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뿐이다. 어떻게 영광과 권력의 절정에 있던 지휘라는 직업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이 쇠퇴하고 있는 직업군의 상징이 되어 버렸는가? 과연 그 많던 지휘자는 다 어디로 가 버렸는가?

 

4. 저자는 이같은 갑작스러운 지휘자 부족 현상과 연주의 질적 저하 그리고 이에 따른 클래식 음악의 쇠퇴라는 총체적 위기는 과거 지휘자 배출의 산실이었던 유럽의 오페라 네트워크의 붕괴나 취학연령의 아이들에 대한 음악교육 시간의 감소, 클래식 음악 외의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발전 등 음악외적인 요인들에도 일부 원인이 있지만 지휘자들 스스로가 자초한 측면이 훨씬 크다고 말한다. 위대한 지휘자들이 권력의 정점에서 자신들의 종족이 멸종으로 치닫는 길을 닦아 왔다는 것이다. (1)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지휘자들의 원조격으로 지휘를 통해 거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카라얀의 서거 이후 지휘계의 원로들이 사라지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소유한 에이전트들의 도움을 받는 소수 톱 클래스 지휘자들의 몸값이 치솟기 시작했고, 이들 소위 ‘제트族’ 지휘자들은 밤새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면서 각기 다른 나라에 있는 세 개의 오케스트라나 오페라 하우스에서 지휘하고 미디어의 창구를 독점하면서 배타적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지키는 데 전념하고 있다. (2) 그 결과 젊은 신진 지휘자들이 차분히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키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이들의 카르텔이 지배하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게 되었다. (3)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지휘자집단은 점차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괴리되어 더 이상 과거처럼 서로 깊은 정서적 음악적 교감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며, 자신의 삶과 영혼을 한 오케스트라에 바치며 깊이 있는 해석과 특색 있는 사운드를 창조하는 지휘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금전적 이익을 앞세우며 비행기로 몇 개의 대륙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지휘자들에게 깊은 통찰력과 높은 정신적, 예술적 수준의 공연을 바랄 수는 없다. (4) 지휘자 집단을 막후에서 조종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에이전트들이 좋은 음악을 명확하게 구분할 능력이 없는 순진한 대중들에게 아직 준비되지 않은 미숙한 지휘자들을  마에스트로로 소개하면서 음악의 질은 더욱 떨어지고 서로 비슷비슷한 피상적 해석이 넘쳐나고 있다.

 

5. 저자는 클래식 음악이 이미 서구 문명을 대표하는 자리에서 하찮은 존재로 전락한지 오래며, 현재 지휘자들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로움이 어떻든간에 지휘의 미래는 극히 어두워 보인다고 전망한다. 그리고 클래식 음악의 쇠퇴는 지휘계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지휘계의 위기는 물질적인 야망을 예술적 고려보다 앞세우는 가짜 신들이 군림하는 연주회장에 대중들이 실망하기 시작한 1990년대 들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선배들의 탐욕과 가식을 경멸하고 현대에 맞는 음악으로 대중과 소통하고자 하는 일군의 젊고 재능있는 지휘자들의 등장에서 희망을 발견하며, 아마도 “잃어버린 지휘자 세대” 가 될 이들에게는 이전까지의 직무 유기를 종식하고 그들 자신과 그들의 음악에 대한 대중의 믿음을 재건하고 가시돋친 자아로 무장한 음악계의 편견과 싸워야 하는 엄청난 책임이 주어져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클래식 음악이 너무 쇠퇴하는 바람에 오히려 그들을 기다리는 미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에 더욱 유리한 백지상태로 펼쳐져 있다고 격려한다.

 

6.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직업 중 하나로 꼽힌다는 지휘자와 그 직업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별들에 관한 이야기인 이 책은 아마도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재밌고 흥미진진할 것이다. 또한 “거장”이라는 신화의 아우라 뒤에 감추어진 놀랍고 심지어 추악하기까지 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저자의 거침없는 필치와, 클래식 음악계의 위기의 원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그리고 그 책임에 대한 준엄한 비판은 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의 오늘이 어떠하든, 그리고 그 쇠퇴와 위기의 이유가 무엇이든 저자의 말마따나 수명이 짧은 대중음악과는 달리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인류문화의 정수인 클래식 음악이 결국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위대한 마에스트로의 마지막 세대에 속했던 故 게오르그 솔티의 말대로 “클래식 음악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목차

 

서문 11 

- 신화의 탄생

1장 광대의 눈물 33

- 작곡가의 지휘

- 최초의 전문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개인적 비극

2장 정직한 한스와 마법사 71

- 아르투르 니키슈와 한스 리히터

3장 오페라하우스의 명인들 99

- 구스타프 말러와 그의 두 제자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4장 독재자와의 만남 149

- 토스카니니 대 푸르트벵글러

- 소비에트 체제의 지휘자들 :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쿠르트 마주어

5장 카라얀의 경우 219

- 카라얀과 카를 뵘

6장 굶주린 사람들과 귀족의 부재 287

- 보스턴 심포니의 지휘자들: 세르게 쿠세비츠키에서 오자와 세이지까지

- 쇼비즈니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앙드레 프레빈

7장 정원의 그렘린 333

- 토머스 비첨 대 존 바비롤리

- 코번트가든을 거쳐 간 지휘자들: 게오르그 솔티, 콜린 데이비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

8장 지휘하는 작곡가의 몰락 385

- 뉴욕 필하모닉의 지휘자들: 레너드 번스타인과 피에르 불레즈

9장 빈 숲 속의 이상한 이야기 421

- 빈 필하모닉의 유대인 지휘자들: 레너드 번스타인, 로린 마젤, 제임스 레바인

10장 포르물라 우노 463

- 이탈리아 지휘자들: 클라우디오 아바도, 리카르도 무티, 주세페 시노폴리

11장 무소속 인물들 505

- 야샤 호렌슈타인,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에리히 클라이버와 카를로스 클라이버 부자, 클라우스 텐슈테트

12장 내부자 거래 533

- 다니엘 바렌보임, 주빈 메타와 유대계 마피아들

13장 아웃사이더 567

- 동성애자, 여성, 흑인 지휘자들

14장 지휘자에 준하는 인물들 597

- 실내악단과 지휘자들: 네빌 마리너

- 고음악과 지휘자들: 데이비드 먼로, 크리스토퍼 호그우드, 로저 노링턴

15장 그 많던 지휘자들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629

- 사이먼 래틀, 에사페카 살로넨, 리카르도 샤이, 프란츠 벨저뫼스트

16장 모든 지휘자들을 지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671

- 로널드 윌포드와 억만장자 지휘자들

17장 디미누엔도 719

- 공공연한 일이 된 지휘계의 위기

18장 21세기 지휘계의 동향 727

- 클래식 음악은 영원하다

부록

지휘자 약력 744 / 한국의 지휘자들 7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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