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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예술/음악

레너드 번스타인 (베리 셀즈 지음, 심산 펴냄)

by 서음인 2016. 5. 31.

이 책은 “The Political Life of an American Musician"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의 대표적인 지휘자이자, 세 곡의 교향곡과 유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를 쓴 작곡가, 피아니스트, 교육자, 문필가이기도 했던 레너드 번스타인(1919-1990) 의 삶과 음악을 그가 살았던 냉전기의 미국사회와 그의 진보적 정치성향이라는 정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레니즘이라 불리는 춤추는 것 같은 열정적인 지휘 동작과, 음악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 "인간적인 매력과 지성, 미래에 대한 비전과 자신을 연출하는 힘,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인간에 대한 관심"을 두루 갖춘 이 지극히 미국적인 지휘자는 그의 나이 25 세에 뉴욕 필하모니의 지휘대에 오르는 행운을 잡은 후 지속적인 성공가도를 달리며 미국 음악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여겨졌으며, 타계한지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유명한 지휘자가 뉴딜 시대의 진보무드에 의해 형성된 그의 좌파적 성향(물론 지극히 미국적인 의미에서)을 일생 동안 유지해 왔으며, 그의 신념에 따라 인종문제나 반전운동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해 왔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비밀에서 해제된 FBI와 미 의회도서관의 문서파일들에 근거해서 이러한 진보적 성향으로 인해 번스타인이 젊은 시절부터 FBI 의 지속적인 사찰대상이었고, 매카시즘의 광풍이 미국사회를 휩쓸던 1950년에는 미 국무부의 반국가사범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으며, 1955년에는 여권갱신이 거부된 끝에 자신의 진보적 정치신념을 모두 부인하는 치욕적인 진술서에 서명하고서야 겨우 여권을 발급받아 지휘자로서의 경력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이러한 FBI 의 사찰은 심지어 그가 메카시의 광풍을 헤쳐나와 지휘자로서 절정의 경력을 쌓아 가고 있는 동안에도 지속되었다.

 

저자는 번스타인이 이러한 매카시즘의 광풍과 그 후 지속되는 긴 냉전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젊은 시절 지녔던 낙관주의와 진보의 승리에 대한 믿음을 점차로 상실해 갔으며, 그 결과 “지나치게 쾌활한” 그의 성경이 점차 어둡고 예언자적인 예레미야의 성향으로 바뀌어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망이 번스타인이 지휘 경력의 후반기에 “자신이 무척 사랑했던 나라, 그러나 수없이 스스로를 배반하기만 하는 나라로부터 스스로를 유배시켜” 유럽의 악단들과 주로 작업하게 된 동기의 하나이며, 미국 사회의 보수화와 이로 인한 진보적 상상력의 소실이야말로 그가 필생의 과업으로 여겼던 “불멸의 대작”을 결국 완성하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번스타인의 말러가 그다지도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고난들로 인해 그가 말러의 음악에서 “20세기 전반기에 유럽을 덮친 재앙과 공포를 예언하는 장문의 서사"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재앙과 공포가 영원히 지속할 듯 보인다는 점" 을 예견할 수 있었으며, 말러에게서 그가 발견한 이 비극적 비전을 청중들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업화를 위해 스타를 창조하고 물신화하려는 미국 문화 미디어의 생리를 적절히 이용할 줄도 알았고 또 그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던"  이 스타 지휘자는, 그러나 끝까지 진보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채 그가 살았던 사악한 힘이 날뛰는 ‘어두운 시대’를 숙고하는 사람이었으며, 음악을 통해 자유와 평화라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인간의 소망을  표현하고, 음악으로 청중들을 높은 수준의 윤리적 이상을 가진 공동체로 함께 태어나게 하기를 소망했던 이상주의자요 로멘티스트이기도 했다. “미국의 위기가 미국을 덮치고 있는데도 미국인들은 스스로의 삶을 바꾸기는커녕, 위험의 근본을 이해하고 맞서 싸우는 과업을 맡기는커녕 제각각이고 새롭고 신기하고 개성적인 생각과 믿음에만 빠져 세계를 재앙으로 몰아가고 있는 비인간적, 팽창 지향적, 호전적 경향에 대한 의문제기와 대항을 외면하고 있다”라는 그의 절규가, 바로 그 진보적 비전으로 인해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그의 삶의 여정과 함께 보수의 카르텔이 그 강고한 힘을 과시하고 진보의 꿈이 점점 희석되어 가는 우리 사회를 향해 외치는 예언자의 음성처럼 들리는 것은 나만의 착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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