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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회

박삼종의 교회생각 (박삼종 지음, 홍성사 펴냄)

by 서음인 2016. 5. 30.

1. “제자도, 평화, 공동체를 중심으로 평화로운 한국사회와 말씀을 통한 한국교회의 회복을 꿈꾸는 평화주의자”로 자신을 소개하는 저자는 우리가 청년 실업자 110만, 비정규직 900만에 하루 42.2명이 자살할 뿐 아니라 가계부채 총액이 900조원에 달하는 ‘깨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더 심각한 것은 세상의 빛과 희망이 되어야 할 한국교회마저도 맘몬주의와 권력추구, 번영신학에 오염되고 빚의 노예로 전락한 ‘깨어진 교회’ 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렇게 깨어진 채 쇠락해 가는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현상적, 표피적 진단이나 처방 대신 한국교회를 규정하고 있는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죄의 뿌리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에 의하면 그 뿌리는 바로 “신사참배체제”이다.

 

2. 저자는 다른 지역에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미국의 선교가 한국에서는 (1) 서구 선교사들의 도착 이전에 기독교가 쪽복음서나 권서들을 통해 자생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고, (2) 선교국인 미국과 지배국인 일본이 분리된 소위 제국적 불일치로 인해 기독교가 해방과 근대화의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었으며, (3)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자체적인 신앙의 동력으로 작용했던 것 등 몇 가지 이유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이 가졌던 근본주의적이고 이원론적인 신앙이 한국교회에 그대로 이식되면서 악한 정세와 권세와 대항하는 총체적 복음의 메시지가 훼손되었으며, 그 결과 거의 모든 교회가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수용함으로서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하부에 교회가 국가주의 신앙의 형태로 포섭되는 정치- 종교의 콘스탄틴적 혼합, 즉 “신사참배체제”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와 같은 신사참배체제가 인적, 물적으로 전혀 청산되지 않은 채 모습을 달리해 지속적으로 한국사회와 교회를 규정해 왔으며, 지금도 이 체제에 포섭된 주류 종교 지도자들은 기복신앙이나 번영신학과 같은 이원론적 신앙으로 국가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면서, 그 댓가로 자신들의 종교적, 물질적 기득권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3. 저자는 이러한 신사참배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1) 좌우를 떠나 한국교회 전체가 신사참배체제에 포섭되고 바벨론 유수된 사람들이자 그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한 뼈를 깎는 반성 즉 공동체적 회개와, (2) 신사참배체제의 수혜자로서 누리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맘몬의 노예가 되는 것을 멈춘 채 복음의 메시지가 가르치는 대안적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사회적 회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저자에 의하면 이 대안적 삶이란 (1) 모든 것을 대가의 경제, 거래관계로 환원하는 맘몬의 질서를 뛰어넘는 사회적 예언자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소비 사회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의 이기적 자아를 깨뜨리고 (2)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단독자로 선 개인들이 지배나 섬김의 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한 동무가 되는 벗-동무들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3)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에게 대가 없는 선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스스로의 생활세계를 하나님 나라의 선물의 경제로 창조적으로 형성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며 (4) 전쟁과 폭력을 획책하는 내외의 세력들에게 평화와 화해의 복음을 선포하는 급진적이고 담대한 선지자적, 예언자적 영성을 실천하는 삶이다.

 

4. 이러한 대안적 삶의 실천을 위한 핵심적 전제인 “벗-동무들의 공동체”란 말씀 앞에 단독자로 선 개인들이 함께 작은 단위의 가정교회나 공동체를 이루어 지역 현안에 관여하고 공동체로 나누는 삶을 통해 선교를 이루어나가는 모임으로, 육아나 교육 먹거리와 같은 일상의 문제를 공동체가 함께 책임짐으로서 서로의 존재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선물의 경제공동체이자, 지속가능한 자립적 생산기반에 근거하여 자본권력이나 국가권력이 주는 정체성이나 사회적 문법의 강요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만들어나가는 자치, 자립, 자율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와 같이 지역 공동체로 들어가 일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방식을 세상 가운데 개별적으로 흩어 들어가는 '하나님의 선교'나, 교회라는 구심점을 구축해 나가는 '교회의 선교'와 구별하여 “공동체 선교” 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의 독자들을 바로“벗-동무들의 공동체”와 그들이 함께하는 “공동체 선교”라는 불온한 ‘예수혁명의 길’로 초대하고 있다.

 

5. 한국교회의 문제에 대한 저자의 진단과 처방은 명료하며 급진적이다.  바로 이 타협하거나 핑계대지 않는 단순성,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에 근거한 급진적 제자도의 추구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요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할 필요를 느낀다

 

(1) 한국교회 문제의 뿌리가 신사참배체제라는 저자의 제안은 상당히 독창적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70년이 지난 작금의 한국교회가 가진 모든 문제가 신사참배체제라는 한 가지 거대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친 환원주의가 아닐까? 대개 현실은 저자의 설명처럼 뚜렷한 흑과 백, 선과 악의 대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차선과 차악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일일 가능성이 훨씬 많은 법이다. 더구나 현대는 거대담론의 인기가 사라진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아니던가? 이 ‘거대한’ 이론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더 정밀하고 실증적인 역사적 연구의 뒷받침이 필요해 보인다.       

 

(2) 아나뱁티스트 전통에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 급진적 제자도에 근거한 “공동체 선교”라는 저자의 해결책은 고도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모두에게 충분히 가능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구제불능인 악 그 자체이며, 우리의 유일한 대안은 직접적 참여를 통하여 교회와 사회 전체를 개혁하려는 희망을 포기한 채, 기존의 교회와 자본주의 제체로부터 퇴각하여 소규모 공동체 안으로(비록 그것이 세상을 향해 열려있다 해도) 철수하는 것뿐일까? 아마 이 문제는 니버(R.Nibuhr) 와 요더(J.H.Yoder) 끝나지 않을 대결로 귀결될 듯하다. 어떤 결론을 선택하든  우리는 인간이 가진 욕망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어떠한 체제도 이상주의의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말년의 故리영희 교수의 통찰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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