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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회

다시, 프로테스탄트 (양희송 지음, 복있는 사람 펴냄)

by 서음인 2016. 5. 30.

 1.한국교회가 위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유례없는 성장을 기록하며 한국사회에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역할을 감당해 왔던 한국교회는 이미 세상의 조롱거리와 걱정거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운동가로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영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현재 청어람 대표기획자로 있는 저자는 이에 대해 한국 개신교가 지난 30년간 의지해 왔던 패러다임은 2007년이라는 상징적 해를 기점으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었으며 그 시효가 다했다고 강조한다. 작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미봉책이 아닌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2. 저자는 지난 20년간 한국사회의 전반적 종교화 추세 속에서도 개신교 인구는 홀로 감소세로 돌아서고 있으며, 한국사회의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퇴각하여 수도권에 사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으로 대표되는 특정한 지역적, 경제적, 계층적 울타리 안으로 움츠러들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연합하여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했던 2007년에 일어났던 몇 가지 상징적 사건들이야말로 현재 한국 개신교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잘 드러내준다고 말한다. 


(1) 한국의 대표적 기독교기업으로 평가받던 이랜드에서 벌어진 비정규직 사태는 개신교가 노동이 아닌 자본의 편에 서 있음을 보여주었다. (2) 샘물교회 단기선교팀의 아프간 피랍사태는 선교사 파송 세계 2위인 개신교 선교의 허약한 체질을 드러냈다. (3) 대선에서의 노골적인 장로 대통령 만들기는 개신교를 사회적 갈등의 중재자가 아닌 특정 정파의 후견인이요 이해 당사자로 전락시켰다. (4) 신정아 사태에서 촉발된 학력위조 파문은 개신교 목회자들의 정직과 사회적 신뢰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유력교회와 지도자, 기관들의 처지와 명성은 교회세습으로 대표되는 세대교체의 진통과 돈과 섹스를 포함한 수많은 추문들로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이런 모든 사건들은 2007년과 그 이후 시대를 구분할 수 있는 징후적이고 상징적인 사건들이며, 지난 30년간 한국 개신교권에서 형성한 지향과 기대와 정면으로 어긋나면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의 맹렬한 추구의 결과로 발생한 일이다. 그것은 일탈이 아니라 그간 달려온 노력의 성취이자 결과이자 열매다. 이제는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술을 담을 새 부대를 장만할 때가 되었다.

 

3.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저자는 한국교회 위기의 본질은 세 가지의 오해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 목회자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왜곡이 ‘성직주의’를 낳았고, 교회의 목적과 존재방식의 왜곡은 ‘성장주의’를 낳았으며, 이 둘의 결합이 세상을 싸워 굴복시킬 대상으로 보는 ‘승리주의’를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1)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신분과 역할을 구분하면서 성직자에게 하나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성직주의의 만연은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실패와 일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자 개인의 자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엄격한 직업적 규율이나 통제 없이 방임 상태로 내버려져 있는 목회자 양성 시스템의 문제이자, 절대 다수의 목회자를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로 무한 생존경쟁 속에 내모는 목회職의 안정성과 관련된 구조적 문제다. 


(2) 개혁자들에 의해 정면으로 부정되었던 이러한 성직주의는 교회성장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으로 간주하고 목사를 교회를 성장시키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성공한 성장주의를 만나 정당화의 논리를 얻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성장주의에 사로잡힌 교회는 체질에 맞지 않는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담아낼 수 없는 방식으로 성공과 실패를 규정하게 되며, 바로 그 성장을 위해 교회답지 않은 일에 성패를 걸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다시 교회다움을 버리는 악순환에 빠지고 있다. 


(3) 지난 30년간 한국개신교가 형성해 온 사회적 상상 (social imaginary) 의 결과인 근본주의적 성향은 세상을 싸워서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승리주의적 신앙행태를 낳았다. 그러나 자기성찰이 없는 신념체계로 자신의 무지를 확신의 과잉으로 메꿀 수 밖에 없는 근본주의적 신앙과 그 열매인 승리주의는 전도나 선교 이외에 공적 영역을 만나는 방식을 알지 못하며, 다원주의적인 세상에서 타자나 타종교를 관용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도 못한 채 여전히 영적 전쟁이나 땅밟기로 대표되는 공격적 행태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출하고 있다.

 

4,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할 새로운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저자는 그것을 한국 개신교가 잃어버린‘로고스’, ‘파토스’, ‘에토스’의 회복과, 기존의 교계 패러다임을 대체할 ‘기독교 생태계 구축’ 이라는 두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1) 로고스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경말씀에 대한 경건적 읽기(lectio divina) 뿐 아니라 비판적 읽기(lectio scolatica) 의 전통을 회복하고 이 둘을 통합할 수 있어야 하며, 세상의 문제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학제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독인문학이나 기독교대학의 존재가 필요하다. 


(2)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향한 신앙의 격정과 열심, 즉 파토스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종교 비즈니스를 수행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연출되어진 엑스타시가 아니고, 자기희생을 통해 정의나 평화와 같은 이 세상의 중요하고 거대한 문제와 제대로 맞서 싸우는 가운데 뿜어내는 종교적 파토스의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차분히 일상에서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에토스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삶으로 증명하고 땅에 떨어진 기독교의 평판과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세 가지 덕목을 회복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신앙공동체와의 인정과 지지를 만들어내고, 선한 연합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기독교사회’ 를 위한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구성하고, 적극적으로 시대정신을 붙잡고 그것과 씨름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5. 저자는 이제 한국개신교가 각자도생하는 거대한 공룡이 되기를 꿈꾸는 대신 스스로를 유기적 생태계로 인식하고, 적절한 생태적 균형을 조절하는 능력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교회가 공룡이 되려는 경향을 거스른 채 건물이나 조직이 아닌 역동적 상호관계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것이며, 규모나 건물이 주는 편안함을 기꺼이 포기한 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더 소중한 가치를 위한 모험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저자는 교회생태계 만큼이나 중요한 개신교 지식 생태계와 시민사회 생태계를 정착시켜가기 위해서 청어람과 같은 실험적이고 과감한 개신교적 담론의 장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이들에 대한 지역교회의 적극적인 인적-물질적 지지와 후원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바로 오늘,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속에서 거룩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세속성자(secular saint) 들,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을 위해 바보가 된 예수를 기억하게 하는 거룩한 바보(Holy fools of Christ) 들, 디트리히 본회퍼나 마틴 루터 킹에서부터 양화진에 누워있는 수많은 선교사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순교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삶으로 부르고 계신다.

 

6.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두 권의 책이 있다. 필립 슈패너의 “겅건한 열망”과 칼 헨리의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이다. 형식화된 죽은 정통을 고수하던 당대의 기독교에 맞서 경건의 파토스와 에토스를 되살려낸 슈패너와,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반지성주의에 맞서 기독교적 로고스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감당했던 헨리의 책처럼, 이 책 "다시, 프로테스탄트" 가 기폭제가 되어 성직주의와 성장주의, 승리주의의 늪에 빠져 침몰하는 한국교회가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작금의 한국교회에, 아니 당장 나를 포함한 내 주변에 세속성자와 거룩한 바보, 그리고 순교자로의 부르심에 기끼어 순종할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존재할 것인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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