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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회

젊은 복음주의자를 말하다 (로버트 웨버 지음, 죠이선교회 펴냄)

by 서음인 2016. 6. 2.

기독교 문화관(엠마오) 이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생명의 말씀사), 기독교 사회운동(라브리) 등의 책을 통해 젋은 시절부터 나와 만나 왔던 저자는 이 책, 젋은 복음주의자를 말하다에서 최근 미국교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이머징교회 운동, 그의 표현으로는 젋은 복음주의자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전후 미국 복음주의의 패러다임이 (1) 빌리 그래이엄으로 대표되는 1950년대의 전통적 복음주의자에서, (2) 75년경 이후 빌 하이벨스로 대표되는 베이베붐 세대의 실용적 복음주의자로, 그리고 (3) 2000년 이후 포스트모던과 911사태를 배경으로 등장한 브라이언 맥클라렌으로 대표되는 젋은 복음주의자로 변화해 왔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젋은 복음주의자는 한 마디로 성경에 근거하고 역사적으로 검증된 신앙의 진리를 원하되, 포스트모던이라는 변화된 문화 조건에 맞는 새로운 복음주의 기독교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저자는 새로운 복음주의의 세력인 이들에 대해 사안별로 전통적 복음주의자 및 실용적 복음주의자들과 비교하면서 그 특징을 짚어나가고 있다.

 

(1) 그들은 철저하게 근대성의 토대 위에 형성된 기존의 복음주의를 해체하고 포스트모던이라는 변화된 문화적 정황 속에서 고대와 미래를 함께 어우르는 신앙(ancient-future faith)을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그들은 계몽주의의 지적 범주와만 연결된 전통적 복음주의와의 배타적인 연대를 종식시키고 모든 세대와 장소를 아우르는 넓고 포괄적인 복음적 기독교적 유산과의 연결을 시도한다.

 

(2) 그들은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명제주의적인 신학의 패러다임에서 탈피하여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위 언약적 거대담론의 신학을 지향한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 신학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앙이란 통과의례를 통해서 공동체 내에서 회심을 결단한 개인이 예수를 구현하고 살아내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며, 성경연구란 성경지식을 암기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 성원 상호간의 컴뮤니케이션을 통하여 성경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그 이야기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란 지적 변증을 통해서가 아닌 오직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으며. 교회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곳이어야 한다.

 

(3) 그들은 전통적 개혁주의의 가르침을 넘어서 셀틱 영성이나 가톨릭의 영성을 포함한 좀더 고전적인 형태의 영성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며, 예배에 있어서는 찬양과 경배 형태의 현대적이고 엔터테인먼트적인 예배보다는 하나님의 임재가 강조되는 공동체적이고 전례적인 예배의 형태를 회복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예배에 있어 성례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회력이나 성화(Icon)를 적극 활용한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 예술은 복음을 개선하거나 설명을 돕는 도구가 아닌 구속된 창조세계를 실제적으로 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나 신앙생활 가운데 적극 활용한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계속 마치 필립 슈패너의 책 경건한 열망(크리스찬 다이제스트)의 21세기 버전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슈패너가 오늘날 근대적 명제주의의 함정에 빠져 풍요한 이야기의 힘을 잃어버리고 신앙 공동체의 삶과 유리될 위기에 처한 개혁주의 신학의 모습과,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아닌 사람들의 필요에 집중하는 마케팅 교회의 모습,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 전통적 개혁교회의 예배를 본다면, 이머징 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또 한번 경건한 삶과 영성의 회복을 소리 높여 외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우리는 새로운 복음주의자들이 풍요로운 기독교 신앙의 전통에서 배우려고 하는 열망과, 진리란 진리를 살아내는 공동체를 통해서만 참되게 구현된다는 생각, 예배에 있어 하나님의 임재와 참여자의 영성을 중요시하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 그들에게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이 운동이 영성과 삶을 강조하고 지성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특성상 신비주의와 반지성주의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역시 자명해 보인다. 또한 다양한 신학적 전통에 대한 개방성이란 혼합주의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개화했다고 볼 수 없는 복음주의의 이 새로운 운동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이유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나그네의 길이라면 신학의 여정 역시 마찬가지일 터. 우리의 나그네 여정 가운데 만난 의심할 바 없이 진솔하고 신실한 이 발전 도상에 있는 운동에 대해 의혹과 정죄의 시선보다는 따스한 관심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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