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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교회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온다 (브라이언 맥클라렌 지음. IVP 펴냄)

by 서음인 2016. 6. 1.

아마도 요즘 미국 복음주의권에서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이 책의 저자인 브라이언 맥클라렌으로 대표되는 이머징 교회에 관한 논쟁인 것 같다. 이 운동에 대해서는 21세기 복음주의의 나아갈 길이라는 찬사에서부터 복음주의를 가장한 신비주의요 혼합주의라는 혹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평이한 문체로 쓰여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편안하게 읽히지 않는다. 어렵다는 현대 신학자들의 책을 읽을 때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들에 대해서는 은연중에 ‘타인’이라는 감정이 있었기에 아무리 급진적인 주장이 나오더라도 훨씬 받아들이기 쉬웠던 반면, 저자에 대해서는 ‘우리’ 이라는 생각에 전통적인 복음주의의 영역을 벗어나는 주장에 대해 훨씬 심리적인 저항이 심했던 것 같다. 이렇게 편을 가르는 행위 자체가 저자가 질타하는 근대적 태도이기는 하지만...

 

저자에 의하면 우리의 기독교는 복음주의든 자유주의든 철저하게 ‘근대성’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으며, 그 사실이야말로 포스트모던 시대인 현대에 기독교가 처한 위기의 실체라고 한다. 즉 우리의 ‘근대적’ 세계관과 그에 기초한 전통적 복음주의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유일하거나 궁극적인 방법이 아니며,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는 가능한 수많은 모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신앙은 그에 걸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해야 하며, 사도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근대에게는 근대인의 방식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맞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러한 과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자에 의하면 그것은 기존의 복음주의 기독교보다 “덜 호전적이고 덜 통제적이며 더 관계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이미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상실한 기존의 제도화된 교회가 아닌 예수님 자신이 문제의 해답이심을 믿는 것이다. 또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특정 신념체계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서 그분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는 것이고, 선이란 개인적 경건이 아니고 선한 이웃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급진적인 겸손과 섬김, 그리고 세상에 대한 책임이야말로 구원의 핵심이자 그 필연적 귀결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는 누군가의 친구를 가장해서 복음을 전도하거나 복음을 기계적 프로파간다로 축소하고 상술화시키는 전통적 형태의 회심과 전도방식은 재고되어야 하며, 포스트모던 시대의 참된 전도는 구체적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과 참된 관계를 맺고 그의 대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누가 지옥에 가고 가지 않는가는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며(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며) 우리는 지옥에 대한 공상을 멈추고 천국을 위한 삶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또한 저자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그 나라의 촉매제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가운데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하며, 따라서 복음 전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선교라는 보다 큰 하나님의 사명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교회의 주요 과제는 공동체와 영성의 추구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선교로 수렴되어야 하며, 참된 선교란 서구 문화든  이슬람 문화든 모든 문화 가운데 있는 죄의 요소를 제거하여 그 참된 모습을 회복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것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의 권위는 성경본문 자체가 아니라 성경본문의 배후나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께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은 진리가 이야기와 예술과 인간의 육체 안에서 가장 잘 구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근대 이전 사람들에게서 나온 문헌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교리 모음집이나 문제에 대한 해답집으로 여기는 대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 이야기 가운데로 우리를 초창하며, 나아가 우리 공동체를 창조해가는 이야기책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람은 추상적 개념으로만 살수 없고 이야기나 시 경구 신비와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성경 이야기의  일부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시라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사실 저자의 주장 가운데 독창적이거나 새로운 것은 없다. 근대성 자체에 대한 회의라는 포스트모던적 성찰 자체가 니체에서 푸코 들뢰즈에 이르는 현대철학의 문제의식을 '근대적' 기독교에  적용한 것이며,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여러 이야기들도 사실 과정신학이나 종교다원주의 신학, 성서비평학의 다양한 흐름과 같은 현대신학의 여러 통찰들을 온건한 형태로 복음주의 기독교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런 개념들에 익숙하지 않은 전통적 복음주의자들에게는  당혹감을 주고, 신학적 지식을 가진 정통주의적 복음주의자, 특히 칼빈주의자들에게는 혼합주의의 의혹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독교가 철저하게 근대성이라는 틀에 갇혀 있으며, 복음주의 정통신학 역시 철저하게 근대의 산물이라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복음주의 기독교가 시대를 초월한 궁극적인 기독교의 패러다임은 아니며,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지 않는다면 100년후에 아마쉬 교도처럼 소종파로 전락하여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저자의 경고에 심각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기독교가 시대정신과 결혼한다면, 다음 세대에는 과부가 되고 말 것이다" 라고 경고했던 사회학자 피터 버거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변화하지 않는 진리이고, 어디까지가 변화 가능한 영역인지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된다. 이 책에 나오는 구체적 사안에 대한 저자의 입장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부분도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사실 대다수의 항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판단보류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각각의 입장들이 전통적 복음주의에 대해 가지는 의미와 폭발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변화의 위험 때문에 모험을 회피하고 현상유지를 선택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곧 기독교의 쇠퇴를 의미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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