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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모음/믿음을 묻는 딸에게 1

매니큐어 하는 할아버지

by 서음인 2021. 1. 20.

우리 병원의 단골 중 할아버지 한 분이 계십니다. 자그마한 키에 등이 약간 굽고 심한 흡연 때문인지 기침을 달고 사시는 이 할아버지는 잊을만 하면 지팡이에 온갖 약봉지를 주렁주렁 달고 찾아와 약을 타가곤 하십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이 할아버지는, 그러나 어디서나 눈에 확 띠는 분입니다. 언제나 길게 기른 손톱에 형형색색의 매니큐어를 칠하고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날은 수수하게 단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오시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네일아트를 받으신 듯 손톱이 정교한 무늬와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날은 빨간 색 립스틱까지 콤비로 칠하고 오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료실 컴퓨터의 접수환자 목록에 그분의 이름이 뜨면 저는 반사적으로 오늘은 어떤 매니큐어를 칠하고 오실까 궁금해 하며 들어오는 할아버지를 맞이합니다. 가끔 아무 것도 칠하지 않은 수수한 손톱으로 나타나시는 날은 뭔가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개원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 할아버지가 처음 우리 병원에 들르셨을 때 저는 대기실이 당연히 시끌벅적하리라고 예상했습니다. 과거의 경험에 의하면 시골에서 남자가 매니큐어를 칠하고 공공장소에 나타나는 것은 반드시 주변 사람들의 시끄러운 개입과 근엄한 훈계를 불러일으키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병원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모두들 이 이질적인 할아버지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대기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힐끗 한번 쳐다볼 뿐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아무도 그 할아버지에게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당히 놀랍고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무관심 내지는 무반응은 이 할아버지가 병원에 들를 때마다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내내 이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막 성인이 되었던 한 세대 전과 비교해보면, 한국사회에서 튀는사람에 대한 관심과 태도가 많이 바뀐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때는 길거리에 외국인이라도 한 명 나타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무례할 정도로 눈길을 주거나 심지어 졸졸 쫓아다니기 일쑤였습니다. 길거리에서 여성이 담배를 핀다고 따귀를 때리는 무뢰한들이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던 시절이라, 여성들이 담배를 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두컴컴한 카페나 여학생 휴게실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남성이 손톱을 칠하거나 립스틱을 바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귀걸이를 하거나 파마를 하고 나타나도 당장 곱지 않은 시선을 한 몸에 받거나 나이깨나 드신 어르신들에게 호통을 들어야 했습니다. 하기야 그 전 세대에는 백주대낮에 경찰이 미니스커트나 장발을 단속한답시고 자와 가위를 들고 시민들과 쫓고 쫓기는 활극을 벌이기까지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저는 이 할아버지에 대해 진료를 통해 알게 된 질병과 관련된 정보 이외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분이 매니큐어를 칠하고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위인지 단순한 취향인지 또 다른 사정이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시골 지역에조차 이 할아버지의 사적 취향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이러저런 말로 간섭하는 것을 당연시하지 않게 된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과거에 비해 조금 더 나아지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라고 생각합니다. 타자의 존재 방식이나 사적 취향에 대한 '소극적 무관심' 내지는 '적극적 용납'이야말로 한국사회의 고질병 중 하나인 획일화된 존재 방식의 절대화가 약화되고 있다는 증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 신학자 레티 러셀은 다양성이야말로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커다란 축복이며,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환대야말로 성서 메시지의 근본이자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낯선 자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는데도 하나님의 환영을 받았듯 우리 역시 낮선 자에게 환대를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정한 환대를 실천함으로서 중심-주변, 내부자-낯선 자의 구별이 흐려지고 요란하고 유쾌한 차이가 삶의 당연한 조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새 창조가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주장합니다.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는 강남순 교수는 자신의 학문적 여정이 새로운 물음 묻기를 통한 세계 개입과 인류 보편가치로서의 정의 · 평화 · 평등 · 연대의 가치를 확장하고 실천하기 위한 활동비판적 저항으로서의 인문학적 성찰의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만난 신은 고통과 절망의 현장에서 함께 고통스러워하는 연민의 신’. 정의롭고 평등한 세계로 변혁하기 위해 씨름하는 연대의 신’,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끌어안는 포용의 신’, 그리고 모든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고귀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따스하게 맞이하는 '환대의 신'” 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강남순 교수는 우리가 존재 방식의 획일성을 강요하는 폭력성을 넘어 모든 개별인들이 서로를 온전한 존재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세상은 이미 그런 길로 접어들었고 다양한 갈등과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한국교회의 대대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잣대에 맞지 않는 죄인들을 언제든지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에 묶어 기꺼이 지옥으로 보내려는 결기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교회는 언제쯤 매니큐어 하는 할아버지를 변화시킬 대상으로 여기는 대신 그 존재 자체로 존중하고 환대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개종에 버금가는 결단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할아버지를 못 본 지도 꽤 오래되었습니다. 다음에 뵙게 되면 더 반갑게 맞이해 드려야겠습니다. 아니, 그냥 다른 분들과 동일하게 대해 드리는 것이 더 옳겠군요!

 

 

강남순,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2018

강남순, 정의를 위하여』, 동녂, 2016

레티 러셀, 공정한 환대, 여금현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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