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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모음/믿음을 묻는 딸에게 1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품으라

by 서음인 2021. 1. 26.

제가 처음으로 비전아이캠프를 위해 방문했던 나라는 동북아시아의 M국이었습니다. 봉사를 떠나기로 예정된 날 부푼 마음을 안고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일요일 오후에 출발할 예정이던 비행기는 현지에 있는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지연에 지연을 거듭하다 월요일 새벽 3시 경에야 출발했고 세 시간여의 비행 끝에 월요일 새벽 5시에 마침내 수도에 도착했습니다. 봉사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기 딱 3시간 전이었습니다. 바로 호텔로 이동해 짐만 풀어놓고 이미 환자들이 장사진을 차고 있을 병원으로 달려가야 겨우 약속했던 시간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앞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검색대에서 세관직원이 의료장비와 약품이 들어 있는 짐들에 대해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직원은 개인들의 가방까지 하나하나 열어 보면서 이런 저런 핑계로 우리 짐을 통관시킬 수 없다고 제동을 거는 같았습니다. 이런 일을 대비해 한국에서 미리 가져온 통관 관련 서류를 내밀었음에도 그 직원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시간과 돈을 들여 봉사하겠다고 이 나라에 왔는데 처음부터 이런 일을 겪어야 하다니. 저는 발끈했습니다

 

 아프리카의 M국에서 열린 캠프에 참가했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 팀은 한국사람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진료와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캠프에 참여하는 의료진 및 자원봉사자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해외봉사를 꿈꾸어왔고, 귀한 휴가와 많은 돈을 들여가며 어렵게 봉사의 기회를 얻은 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에게 허락된 봉사의 시간을 한 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에게 병원을 제공한 현지 의료진이나 병원 직원들의 표정이 영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오후만 되면 우리 팀의 스텝들에게 계속 뭔가를 불평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하루당 얼마의 병원 사용료를 요구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화가 나 있던 상태에서 봉사의 일정이 늦게 끝나기까지 하니 대단히 불쾌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투덜거렸습니다. “아니 자기 나라 사람들을 도와주러 멀리서 온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당신들이 이렇게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지.”

 

이 두 가지 예는 비전케어뿐 아니라 한국에서 단기의료봉사를 다녀온 개인이나 단체라면 모두들 한 번쯤 겪어보았을 법한 일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돕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을 품고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현지에 방문했다 이런 일을 겪게 되면 많은 봉사자들은 당혹이나 분노의 감정을 품게 되기 마련입니다. 당연히 저 역시 그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더 많은 캠프에 참가하게 되면서 점차 제가 품었던 분노 중 많이 부분이 실제로는 상대방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기중심적 사고와 은밀한 우월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세관 직원이 우리를 붙잡고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는 것은 뇌물이나 뒷돈을 요구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본다면 그들의 태도는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비전케어가 봉사를 위해 현지에 가지고 가는 장비나 의료물품들은 우리 입장에서 보더라도 매우 고가입니다. 하물며 현지에서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만약 이렇게 고가일 뿐 아니라 구하조차 힘든 의료물품이나 장비들을 아무런 제지 없이 들여와 현지에서 마음대로 유통한다면 그 나라의 의료체계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도우러 왔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고 발끈할 수 있겠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그 직원은 의도는 불순했을지언정 그 나라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례에서 병원 직원들의 불평 역시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개발도상국들은 대개 사회주의 의료 체계를 채택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 말은 원칙적으로 모든 의료가 공공의료이고 의료인들 역시 모두 공무원 신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나라들은 대개 의사는 많은 대신 의료에 투입되는 재정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의료진의 급여 역시 열악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 의사들이 퇴근 후 집에 개인 클리닉을 차려 따로 진료하면서 수입을 보충하고 국가는 이를 묵인해주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우리 팀이 봉사를 위해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병원에 머무르게 되면, 그간 해왔던 퇴근 후 진료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찾아와야 할 환자까지 빼앗기는 셈이 되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각 나라의 사정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점차 역지사지의 눈으로 현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처음에는 도저히 납득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들의 행동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의료봉사에 대한 제 생각은 마침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현지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풀기 이전에, 우리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먼저 훨씬 커다란 환대를 베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알고 보니 저는 봉사의 주체이기 이전에 환대의 대상이었습니다.

 

현지 보건당국은 한낱 외국인에 불과한 우리가 캠프를 열 수 있도록 임시면허를 발급해 주었고, 현지 병원 관계자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피해를 무릅쓰고 기꺼이 자신들의 일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현지 지역사회는 낯선 이방인들에게 커다란 친절과 호의를 보여 주었고, 현지의 환자들은 동양의 한 작은 나라에서 온 누군지도 모르는 의사에게 기꺼이 자신의 눈을 믿고 맡겨 주었습니다. 봉사자인 우리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여겼던 이 일들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하나하나가 모두 놀라운 환대였습니다. 그들은 가끔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의 봉사를 방해하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기본적으로 이런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이미 받은 놀라운 환대에 비하면 미미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가끔 봉사의 현장에서 부당하게 느껴지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이에 대해 여전히 당혹해하거나 분노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 달리 내가 부당하다고 여기는 일에만 집중해 즉각 분노를 표출하기보다, 신이지만 인간이 되어 고난과 죽음까지 친히 겪은 역지사지의 절정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봉사지에서 받아 왔던 수많은 환대를 기억하면서 그들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될 같습니다. 앞으로도 봉사지에서 가끔 겪게 될 이런 어려움들이 저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서툰 봉사자에서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타인을 포용하는 더 성숙한 봉사자, 더 훌륭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들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동문, 중동선교의 시작과 끝을 묻다, 대장간, 2017

김동문, 우리는 왜 이슬람을 혐오할까, 선율, 2017 

레나 테일러, 선교현장 이야기, 정민영 옮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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