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고모음/믿음을 묻는 딸에게 1

‘빨간 약’을 드시겠습니까? - 계시록 읽기

by 서음인 2021. 1. 27.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문학작품을 들라면 요한계시록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위험성을 경고해 왔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 책이 보여주는 종말, 휴거, 말을 탄 네 사람, 적그리스도, 666, 최후의 심판과 같은 무시무시하지만 매혹적인 환상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서구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수많은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켰고 현재도 판타자 문학이나 영화, 게임과 같은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험한 책을 진지하게 현실로 받아들인 수많은 사람들은 임박한 종말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집과 재산을 팔고 광신적인 소중파의 일원이 되거나, 처참한 비극으로 끝난 새 하늘과 새 땅의 건설을 위한 반란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 체스터튼은 계시록의 환상 속에서 사도 요한이 만났던 어떤 괴물도, 계시록을 희한하게 오독하는 해석자들만큼 사납지는 않았다고 재치 있게 일갈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1세기 말경 로마 제국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밧모라는 섬에 갇힌 요한이라는 저자가 본 환상을 바탕으로 기록된 성서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 책이 그렇게 위험하게 여겨져 왔던 이유는 바로 묵시라 불리는 특수한 문학양식을 차용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묵시란 기원전 200년경부터 약 300년 동안 유대인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이야기체의 문학 양식으로 전 우주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선과 악의 치열한 싸움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악의 지배로 어떠한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현 시대는 때가 도래하면 신적인 존재나 그 대리자의 초자연적이고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뀐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묵시문학은 이러한 내용과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친숙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기괴하고 낯설게 느껴지는 다양한 상징이나 그림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렇게 우주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대결과 현 시대에 대한 철저한 심판, 그리고 다가오는  새 시대에 대한 열망이 무섭고도 환상적인 그림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과 위험을 동시에 설명해 줍니다.

 

 역사적으로 요한계시록의 본문이 과거 현재 미래의 어느 시점을 묘사하고 있는지에 대한 견해 차이로 크게 네 가지의 해석병식이 존재해 왔습니다. '과거주의'는 계시록이 전적으로 로마 제국 시대에 살던 계시록의 1차 독자들이 겪었던 고난과 소망을 묘사한 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과 환상들은 정치적 위험을 피하면서 초대교회가 겪었던 고난을 묘사하거나 박해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소원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의 방식인 '역사주의'는 계시록의 내용이 과거의 특정 시기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묘사하는 그림언어라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동시대에 자신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세력을 계시록이 묘사하는 악의 실체로 간주합니다. 루터는 당대의 교황을 계시록에 나오는 뿔 달린 악한 짐승과 동일시했고, 냉전 시대에는 소련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으며, 냉전이 끝난 후로는 일부 이슬람 국가와 테러 집단이 새로운 악의 축이 되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식인 미래주의에 따르면 계시록은 종말이라고 부르는 미래의 어느 때가 되면 문자적으로 실현될 사건들을 예언해 주는 문서입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휴거나 대환난 같은 종말의 표상은 바로 이 미래주의자들이 사용하는 환상들이며, 역사에 주기적으로 등장해 떠들썩한 물의를 일으켜 왔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바로 이 미래주의 진영에 속한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상징주의는 계시록의 환상들이 특정한 역사의 시기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오심으로부터 시작된 역사의 전 시기에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다양한 상징을 통해 보여주는 그림언어라고 주장합니다. 이 방식을 따라 계시록을 해설하는 자끄 엘륄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마지막 때란 미래에 있을 역사의 한 순간이 아닌 이 세상의 감춰진 차원혹은 역사적인 것의 항구적인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만약 이 환상들이 전적으로 과거를 묘사한 것이라면 계시록은 박해받던 기원후 1세기 말경의 교회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여러 사료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 환상들이 역사의 특정 시점 혹은 미래의 특정 시점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계시록은 종말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교하지만 위험한 그림퍼즐을 맞추기 위한 조각들의 모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현실과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실 너머의 또 다른 실재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해한다면 요한계시록을 읽는 일은 영화 <매트릭스>빨간 약을 삼키는 것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에서 빨간 약과 파란 약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받은 네오는 진실을 알려주는 빨간 약을 삼킨 후 그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가상공간 이면에 존재하던 진짜현실세계의 비참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기를 들고 악의 세력에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길을 선택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천사가 보여준 환상이라는 빨간 약을 먹은 후 그가 살아가는 고난과 박해로 가득한 현실의 이면에 존재하는 신적 초월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이 로마제국에 의해 당하는 박해마저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도되는 더 큰 그림의 일부이며, 심지어 지금 그들이 당하는 고난과 박해와 순교야말로 예수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에 치열하게 맞서는 싸움의 방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이라는 빨간 약로마 제국이야말로 세상과 역사를 주관하는 궁극적인 실재라고 주장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이면에 존재하는 신적 활동을 보여줌으로써, 실재에 대한 제국의 거짓된 관점을 반박하고 있는 당대의 가장 강력한 저항 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차적으로 과거에 뿌리박고 궁극적으로는 미래를 지향하지만, 압도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예배와 행동을 촉구하는 예전적이고(ritual) 정치적인(political) 텍스트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예수를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하여금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시민 종교를 거부하는 예배와 증언을 기꺼이 감당하는 더 신실하고 더 참여적인 공동체가 되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요한계시록은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내를, 중간지대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결단을, 현재에 만족하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각성을 촉구합니다.

 

이 과정에서 요한계시록은 놀랍게도 세상과 맞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무기가 무력이나 폭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와 성서의 증언 그리고 순교까지도 감수하는 희생이라고 강조합니다. 기독교 신학자인 마이클 고먼은 요한계시록을 악한 사람들이나 체제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책으로 읽는 것은 이 책의 상징과 구조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에서 악을 제거하지만, 총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자신이 흘린 피와 그 입에서 나온 칼인 성서의 말씀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요한계시록은 매우 위험한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이 책을 이용해 그럴듯하게 꾸며낸 허접한 종말의 시간표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부 양복 입은 무당들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계시록이 모든 형태의 우상과 시민종교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강력한 반제국주의의 메시지를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제국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자발적 고난과 순교라는 극단적인 비폭력 저항의 길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실 너머에 있는 종말과 천국을 바라보게 하기보다, 바로 그 고난의 한가운데서 고난과 인내를 통해 참된 증인이요 제자로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책입니다.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라고 노래하는 신자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제자를 위한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누군가가 지금까지 누려온 일상과 예배의 평온함과 안락함을 계속 유지하며 종교인의 이름을 누리면서 적당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이 위험한 책을 영원히 봉인된 채로남겨놓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리차드 보쿰, 요한계시록 신학, 이필찬 옮김, 한들출판사, 2000

크레이그 퀘스터, 인류의 종말과 요한계시록, 최홍진 옮김, 동연, 2011

마이클 고먼,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 박규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4

에두아르드 로제, 요한계시록, 박두환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7

자끄 엘륄, 요한계시록 주석, 유상현 옮김, 한들출판사, 2000

밀라드 에릭슨, 현대 종말론 연구, 박양희 옮김, 생명의말씀사, 199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