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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사회/한국사회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문학과 지성사 펴냄)

by 서음인 2016. 5. 30.

1.한국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독일로 건너가 철학과 독일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한 후 지금은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을 가진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지난 세기가 타자와 나를 구분한 후 타자를 부정하고 제거하는 면역학의 시대였다면, 금세기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로 초래된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해 유발되는 신경증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20세기의 냉전이 타자를 부정하는 면역학적 시대의 필연적 귀결이라면 냉전의 해체와 세계화의 과정은 타자성의 소멸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2. 지난 세기를 특징지웠던 면역학의 본질은 공격과 방어, 즉 폭력이다. 여기서 면역반응의 대상은 타자 그 자체이며, 전혀 적대적 의도를 가지지 않았거나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질성과 타자성이 어떠한 면역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면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긍정의 과잉은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이러한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며, 배제하기보다 고갈시키는 신경증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내재하는 폭력이기에 타자의 부정성을 물리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면역학적 기술로는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3. 오늘날의 사회는 더 이상 복종적 주체를 요구하는 푸코적 의미의 규율사회가 아니고 성과주체를 필요로 하는 성과사회로 바뀌었다. 이러한 성과사회에서는 규율이나 금지라는 부정적 도식이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치되고 사회적 무의식 역시 당위에서 능력으로 방향을 바꾼다. 부정성의 사회인 규율사회가 금지, 명령, 법률에 의해 유지된다면 성과사회에서는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러한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는 ‘긍정’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피로하고 지치게 되며, 우울증이란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인간의 좌절에 대한 병리학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이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면 성과사회의 과도한 긍정성의 결과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4.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며, 문화란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후기근대사회에서 이러한 깊은 주의는 다양한 과업과 정보처리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멀티태스킹이라는 형태의 과잉 주의 혹은 산만한 주의에 의해 대치되고 있다. 심심함과 머뭇거림을 참지 못하는 이러한 산만함과 과잉활동은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脫서사화된 채 개별화되고 고립된 개인들이 느끼는 존재의 결핍과 극단적 허무에 대한 반응으로, 이러한 긍정과잉의 성과사회에서는 누구나 저마다의 노동수용소 안에서 자신이 포로이자 동시에 감독관이 되어 외부의 지배 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며 자신을 자폐적 성과기계로 만들게 된다. 이러한 퇴보와 착취를 되돌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것이며, 이것은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저 긍정하는 수동적인 자기 개방 대신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를 통해 어떤 활동과잉보다 더 활동적으로 되도록 해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심심함과 머뭇거림이야말로 행동이 노동으로, 사색적 주의가 산만한 주의로 퇴행하는 것을 막는 데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5. 오늘날 사람들은 이러한 성과사회에 대해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채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짜증이나 신경질로 반응한다. 그러나 오직 분노만이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는 긍정성을 넘어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어떤 상황을 중단하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기에 성과사회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부정적 힘, 분노의 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우리에게는 성과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탈진의 피로가 아닌 태평함과 무위의 능력을 부여하는 피로, 그 속에서 영감과 특별한 시각이 깨어나는 피로, 타인과 손 맞잡고 놀이하는 ‘우리-피로’ 역시 필요하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이 피로의 시간은 바로 성경의 안식일과 같이 목적 지행적인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 쓸모없는 무위와 막간의 때이다. 만약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 넣는 사회이자 성과사회와 대척점에 있는 오순절-사회가 우리가 소망하는 미래 비전이라면 그 사회야말로 이러한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피로사회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6. 과연 한국사회는 성과사회인가? 아마도 그렇다고 대답하야 할 것 같다. 어디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더 이상 애통하는 자, 분노하는 자. 회의하고 고민하는 자는 환대받지 못한다. 세상이든 교회든 사방에 오직 긍정과 성공, 능력의 언어가 가득하며, 오직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하고 회의 없는 확신의 레토릭을 구사하는 사람만이 환영받고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과연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규율사회를 탈피했는가? 글쎄, 여기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아직도 도처에 금지와 명령이라는 규율과 권위의 굴레가 엄존하고 자신과 다른 타자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과 무차별적 공격이 자행되고 있지 않은가? 규율사회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했으면서도 성과사회의 한가운데로 진입해버린 것, 이것이 우리 사회의 불행하고 비극적인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성과와 규율이라는 몹쓸 두 가지 질병을 함께 앓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서 무위와 안식, 심심함과 피로가 우리를 유토피아로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일까? 혹시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방인과 타자를 우리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우리 안에 엄존하는 면역반응을 지우는 탈감작요법(desensitization) 이 더 긴급히 필요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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