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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사회/한국사회

당신들의 기독교 (김영민 지음, 글항아리 펴냄)

by 서음인 2016. 5. 31.

1.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동무와 연인공부론 등의 저서로 나와는 구면인 저자는 “젋은 시절 은사주의적 성향이 강한 교회의 청년부에 소속되어 불트만, 틸리히, 본회퍼, 그리고 서남동과 안병무 등을 읽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신학이나 종교 관계 서적을 유심히 살피고, 듣그럽거나 생게망게한 설교 소리에도 얼마간 넉넉한 마음으로 귀를 열어 놓으며, 소싯적 영성의 무늬를 새겨 준 몇몇 목회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에 발을 끊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경계인이랄 수 있는 이 ‘철학자’ 는 과연 그 명성에 걸맞게 동서고금의 석학들을 자유자재로 호출하여 소위 信者들의 행태와, 그를 통해 드러나는 한국교회의 치부를 특유의 압축적이고도 날카로운 필치로 비판해 나간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제자는 촛농의 힘에 의지한 아키루스처럼 어렵고, 신자는 쓰레기통의 파리 떼처럼 번성하고” 있으며, “ ‘나는 기독교인이다’ 라는 한국교회 신자들의 언명은 마치 ‘예수를 잡아먹은 허깨비들의 장송곡’ 처럼 들린다” 고 말한다.

 

2. 예수를 잡아먹었다는 이 허깨비들은 저자에 의하면 때로는 “주체화를 위한 실존적 반성에 이르지 못하고 습속과 습관에 의해 규제된 채, 기존의 체계를 완결시키는 신화의 지평이 되어버린 종교” 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부모나 남편과의 관계에서 소외된 애정이 심리적 공명을 통해 신의 매개자/대리인인 목사에게 고착된, 강력한 리비도적 결속과 쾌락”의 징후를 띄기도 하며, 때로는 “노동을 비천하게 여기고 공인된 약탈행위를 명예로 여기는 유한계급의 특성을 시대착오적으로 담지한 성직자 계층에 의해 자행되는, 誤入이라는 하얀 살에 대한 약탈적 훼손”이라는 형태로 출몰하기도 한다.

 

또한 이 허깨비는 “삶의 총체성과 그 중층의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신비주의라는 이름의 종교적 관능주의(자)”이기도, “말이 말을 이끌면서 필경 반복적 강박의 형식을 통한 쾌락을 낳는, 음성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목회자”이기도 하며, “각별한 진지함 없이 일종의 사교활동처럼 세련되게 자신의 종교를 대하는 이른바 문화적 기독교인”이기도, 그와 반대로 “진리와 자신의 현존 사이의 어긋남과 그 안타까운 소격을 알지 못한 채 맹신 속에서 스스로가 책이 되어버린 노방전도자”이기도 하다.

 

3. 이러한 “당신들의 기독교”에 대해 저자는 “예수나 신불 등이 다만 ‘되지’ 않고 ‘믿기’ 위해 주어진 최종심급의 심리제도적 장치였다면, 종교는 그 자체로 이미 장례식" 인 것이며, 예수를 두 번 죽이지 않으려면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 불과한 ‘신자’의 길을 포기하고, 제자의 길, 그러니까 어렵사리 몸을 끄-을-고 예수를 따라 종교에서 삶으로, 내세에서 현실로, 종말론적 환영에서 지금 이것으로, 고백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삶의 양식” 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과오와 개선의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내부의 불안과 의심을 다스리며 쉼 없는 재투기의 노동을 통해서 믿음의 주체화를 이뤄가는” 일이며, “예수라는 진리사건에 십자가를 지고 동참하는 생활양식의 일관성을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 채워 넣는” 행위이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가 이 세속 속의 다른 삶을 통해 체계 너머를 엿보는 다른 ‘장소’의 현실이 되는”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스승 예수가 이미/늘 당대적 체제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면서 어떤 희망(하나님의 나라) 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동무 공동체를 이끌던 일종의 노숙자” 였다는 사실을 되새긴다면, 교회라는 ‘장소’는 이미 “체제와의 창의적 불화를 새로운 생산성의 동력으로 삼는 소수자들의 진지이자 쉼터이며, 공부터이자 놀이터이고, 집이자 그 자체로 다른 길(좁은 길)에 들어선 셈”이며, “무엇보다도 화폐적 교환의 산물이 아니라 무상의 가없는 노동이 쟁여진 곳이며, 그래서 객관적 가능성보다는 상호주관적 관계성을 윗길에 놓는” 곳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우리에게 조언한다.

 

4. 깊고 아득한 人文의 바다를 날렵하게 종횡하며 촌철살인의 날카로운 칼날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그의 글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더구나 인문학의 내공이 없이 기독교 신학의 언어와 사고체계에만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마 이 자그마한 책이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로 여겨질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이야기들을 왜 내 몸과 머리는 본능적이라고 할 만큼 잘 빨아들인 것일까? 아마도 그가 말하는 “당신들의 기독교”야 말로 내 몸 안에 깊이 주입되고 각인되어 나와 구분할 수 없이 내 자신이 되어버린 바로 그 기독교이기 때문은 아닐까?

 

어찌 되었던 앞으로도 “아버지의 집을 깨치고 나와, 없는 길에 발자국을 남기고 점점이, 낯설게 내 거처를 마련하고 실험하는” 그의 길에 큰 성취가 있기를, 그래서 앞으로도 나 같은 사람에게 그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러기라도 허락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그 나름의 ‘이단’을 창설하기 위해 미지의 땅을 찾아나선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도착한 곳이 ‘정통신앙(Orthodoxy)’ 이라는 그의 집 앞마당이었다”는 체스터튼의 예에서처럼, 그의 험난한 여정의 종착점이 “아버지”의 품이 되기를 또한 바란다. 물론 그곳이 “보수정통” 이거나 “당신들의 기독교”라면 내 자신이 먼저 실망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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