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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사회/정치경제사회

출애굽과 혁명 (마이클 왈저 지음, 이국운 옮김, 대장간 펴냄)

by 서음인 2021. 5. 5.

『출애굽과 혁명』은 ‘다원적 정의’로 잘 알려진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가 출애굽기의 내러티브를 “원형적 해방사건”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왈저는 출애굽기 이야기는 서구에서 오랫동안 혁명적 정치의 원형이자 모델로서 기능해 왔으며, 단순한 방랑기가 아니라 시간/공간적 전진 및 도덕적 진보/내면적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인 운동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착취와 소외에서 해방되고 인간적 존엄성을 지니고 살 수 있는 땅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이집트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려는 퇴행의 유혹과 단박에 광야를 뛰어넘으려는 천년왕국적 메시야주의를 거부하면서, 설득과 교육과 연대의 힘으로 거친 광야 길을 한 걸음씩 해쳐가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왈저는 이 원리가 혁명 정치 뿐 아니라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모든 정치에까지 적용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작지만 쉽지만은 않은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간략한 단상을 덧붙인다.

 

요약

 

이스라엘은 처음에 이집트의 객이었다가 강제노역의 대상인 국가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신적 약속을 소유한 이스라엘에게 이집트의 억압은 체념과 쇠퇴가 아닌 분노와 저항, 그리고 해방의 갈구라는 집단적 반응을 낳았다. 한편 이스라엘의 오랜 예속기간은 노예근성을 뼛속까지 내면화한 나머지 과거에 접했지만 누리지는 못했던 이집트의 문명과 문화(‘고기 가마’)를 동경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해방을 끊임없이 불평하는 사람들 역시 만들어 냈다.

 

모세와 백성들 사이의 갈등은 백성의 물질주의(‘젖과 꿀’)와 지도자의 이상주의(‘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 현재의 요구와 미래의 약속 사이의 괴리 때문에 발생한다. 모세는 출애굽의 우선적 목표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을 설립하는 것이며, 그 때에야 비로소 그 땅이 젖과 꿀에 대한 약속을 완성할 것이라고 믿었다. 광야는 이스라엘 자손이 노예근성을 철저히 씻어내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날 때까지 그들을 훈련시킬 영혼의 학교가 되어야 했다.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으로 올라간 후 사람들의 원망은 반혁명 운동으로 변화했다. 모세가 레위 족속을 동원해 아론에게 황금 송아지를 만들라고 요구했던 분파들을 살해한 것은 최초의 혁명적 숙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법의 집행이라기보다 정치적 결단, 즉 예외상태에서 내린 주권자의 긴급처분이었다. 이 이야기의 ‘레닌주의적 독해’에 따르면 모세의 부름에 자신들의 열성을 칼로 알린 레위 지파는 혁명의 ‘전위’가 되었으며, 그들은 자비 없는 칼의 힘을 빌어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 이야기의 진실은 ‘사민주의적 독해’에 더 가깝다. 모세는 군주처럼 통치하기보다 백성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설득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일상적인 통치업무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 채 새로운 세대에게 새 이스라엘 종교의 법과 의례를 가르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 결과 요단강변에 도달한 이스라엘은 서로 연대하여 언약을 맺은 강력한 “정치공동체”로 변모해 있었다. 반혁명은 힘만으로는 분쇄될 수 없으며, 백성들은 오직 점진적 방식을 통해서만 예속에서 자유의 단계로 변화될 수 있다.

 

조건 없이 주어졌던 이집트에서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까지 성공적으로 데려다 주었지만, 그 이상의 전진을 위해서는 백성들 스스로가 시내산 언약을 준수해야 했다 시내산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대표나 위임을 통해서가 아니라 언약의 조문에 자발적으로 동의한 ‘개인’으로 언약에 동참했으며, 이는 그들이 계약에 책임을 지는 진정한 자유인이자 동일한 목적을 위해 연대하여 전진하는 강력한 “정치적 공동체”로 거듭나는 출발점이 된다. 이 언약은 갱신을 위해 개인들의 명시적 동의나 집단적 언약 갱신 의식이 정기적으로 필요했다.

 

황금 송아지 사건 이후 혁명적 이상은 사제직을 차지한 채 보수화된 전위 활동가 그룹인 아론 족속과 레위 지파들에 의해 독점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예언자들은 사제직의 중심성을 부인하고 윤리적 요구를 대변하면서 모세와 같은 교사 역할을 유지한다. 예언자들은 모세의 이상을 계승해 가난과 불의를 용인하는 것은 출애굽 이전의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것이라고 선포했으며,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의 잘못을 심판하기 위해 신실한 소수 백성들로 당파를 조직하는 방식 대신 언약에 의존해 이스라엘 백성과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도착한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또 다른 이집트’라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러한 약속과 현실의 괴리는 출애굽기에 대한 다양한 재해석을 낳았다. 어떤 집단은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배교와 우상숭배 그리고 서로를 향한 억압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던 ‘광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집단은 약속이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고 강조하면서 미래에 있을 ‘새로운 출애굽’을 소망하는 “유대적 메시야주의”에 빠졌다.

 

“유대적 메시아주의”에 따르면 약속의 완전한 성취는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완성될 새 출애굽 시기까지 연기되어 있으며, 출애굽 이야기는 그때 성취될 인류의 최종적 구원에 대한 유비일 뿐이다. 이 약속에 따르면 새 출애굽의 때 백성들은 어떠한 인간적 노력도 필요 없이 약속의 땅으로 직진할 것이며, 그곳에서 즉각 예언자가 되거나 공화주의적 시민이 될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정치의 비전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의 편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모든 대상에 대한 총체적 적대와 파괴라는 종말론적 전쟁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출애굽 정치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해방의 운동은 전적으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길고 힘든 과정이다. 백성은 살해되거나 버려질 수 없고(레닌주의), 기적적으로 변화되지도 않으며(정치적 메시아주의), 오직 끊임없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점진적으로 변화될 수 있을 뿐이다. (사민주의). 출애굽 내러티브에서 발견되는 변혁 정치의 핵심은 외적 전쟁보다는 내적 전쟁에, 가나안 족속들의 파괴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내적 변화에 있다. 노예근성을 벗어버린 자유로운 개인들이 함께 연대해 맺은 언약에 헌신하며 광야의 고난을 한 발 한 발 통과하는 방법 외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길은 없다.

 

단상

 

저자에 따르면 출애굽기 이야기가 보여주는 혁명 정치의 모델은 과거로 회귀하려는 수구적 퇴행을 거부하고, 소수의 급진 전위조직에 의해 주도되는 레닌주의의 방식도 아니며, 광야의 고난을 건너뛰고 약속의 땅으로의 직행을 약속하는 천년왕국적 메시아주의와도 다르다. 출애굽기의 방식은 자신들이 맺은 언약에 헌신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이 함께 연대해 혁명의 목표를 향해 광야의 난관을 하나하나 헤쳐 나가는 것이다. 그에 더해 저자는 어떤 혁명이든 그 최종 종착지에는 궁극적이고 초역사적인 메시야의 왕국이 아니라 또다른 이집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그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또다시 함께 모여 거친 광야를 향해 행군에 나서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편안함과 익숙함도 포기하고, 전위의 긍지/폭력의 효용도 마다하며, 메시아 왕국의 영원한 영광도 약속하지 않은 채, 한 발짝의 전진을 위해 대화와 설득과 교육과 내적 변화라는 ‘투쟁’을 끊임없이 지속해야 한다는, 이렇게도 비루한 혁명의 비전이라니! 어떠한 개인적 희생과 불이익도 감수하기를 거부하면서 우리를 한 방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 헤매는 대중들에게 대체 이렇게 초라한 ‘혁명 정치’가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아마 그 우매한 자들은 과거에도 그랬듯 오늘도 만만하고 나약해 보이는 ‘출애굽의 혁명 정치가’들을 돌로 치고 십자가에 매단 후, 자신들의 노예근성을 만족시켜 줄 화끈한 유사 파시스트들을 메시아로 호출해 부나방처럼 그 불꽃 안으로 날아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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