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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훈련/책별연구후기

요나서 이해의 몇 가지 키워드와 개인적 질문

by 서음인 2022. 4. 19.

1. 선교

 

요나서의 주된 관심은 ‘이방인’이며, 요나서는 선교를 위한 매뉴얼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스라엘에 한정되지 않고 이방에게까지 미치며, 하나님은 선교사 요나를 죄악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에 보내신다. 요나서는 이방인에게 회개를 촉구하러 가기 싫어하는 완고하고 게으른 선교사인 요나의 소명-거부-회개-침체라는 모델로 가장 잘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지는 심판의지를 압도하기에 요나를 포함한 성서의 모든 내러티브는 궁극적으로 ‘선교적’이며, 요나서의 마지막 질문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답해야 할 현재진행형의 질문으로 남아 있다.

 

2. 보편주의 - 포용과 환대

 

요나서는 룻기와 더불어 구약성서에서 이방인에 대한 포용과 환대의 정신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책이다. 포로 귀환 후의 유대 공동체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영향으로 민족적 종교적으로 편협하고 배타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으며, 이에 반대해 유대교의 보편성과 개방성을 호소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룻기와 요나서라는 것이다. 요나서에 등장하는 이방인들은 요나(및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책임 있게 행동하며 하나님께도 더 민감하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반면, 완고한 요나의 모습은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독점하면서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당연시하는 현대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유사해 보인다. (요나 신드롬)

 

3.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 심판이나 은혜냐

 

요나서의 주된 관심은 ‘예언’과 ‘예언자’, 특별히 포로 후기 공동체에서 벌어진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둘러싼 갈등이다. 요나는 아모스나 예레미야처럼 주로 심판과 파멸의 메시지만을 전했던 전형적인 포로기 이전 예언자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니느웨에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의 회개를 보고 마음을 돌이켜 심판을 유예하셨고, 하나님께 순종해 심판을 선언한 요나는 졸지에 거짓 예언자가 되고 말았다. 요나의 항의는 하나님의 ‘변심’ 때문에 예언자로서의 명예를 상실한 요나의 분노를 보여 준다. 포로 이전에는 심판 선포가 참 예언이었지만, 포로 이후로는 회복의 메시지가 참 예언이 된다.

 

4. 하나님에 대한 변증 - 자유, 주권, 자비

 

요나서의 핵심은 ‘하나님’, 그중에서도 자신의 피조물에게 ‘자비’를 베풀기 좋아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에 대한 변증이다. 요나(와 요나서의 일차 독자들)은 죄악의 도시 니느웨가 하나님의 자비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심지어 이스라엘의 심판자가 된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요나는 자신이 속한 ‘전통’과 전해 받은 ‘진리’에 충실하려고 했던 진실한 선지자였지만, 자유롭게 ‘사랑’을 위해 전통이나 진리 수호를 포기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주권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하나님은 니느웨뿐 아니라 더 큰 악에 빠진 요나까지 용서하셨으며, 이렇게 주권적으로 죄인을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리요 정의다.

 

5. 예수 그리스도 - 자끄 엘륄 

 

요나서가 예언서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하던 요나는 선원들의 개입으로 자신의 죄와 책임을 수용하고 증인, 즉 순교자가 된다. 이러한 그의 희생은 선원들을 구원하지만, 그는 장차 이 일을 궁극적으로 완수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델일 뿐이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호소에 응답해 요나를 구원하시지만, 진정한 회심을 체험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의인이면서 죄인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 신실하지 않다고 항의했지만, 하나님은 무엇보다 그의 ‘사랑’에 신실하신 분이다. 이 하나님은 자신의 정죄(정의) 때문에 고통을 느끼시며, 그 형벌을 삼위의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심으로 친히 고통을 감수하신다.

 

6. 개인적인 질문 - 요나는 완전히 틀렸는가?

 

과연 요나는 완전히 틀렸는가?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평행선을 달리는 '반면교사'일 뿐인가? 이 텍스트에서 문제와 갈등을 유발한 일차적 원인은 요나의 ‘불신’ 혹은 ‘교만’이 아니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하나님의 ‘자유’ 혹은 ‘주권’이 아니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행위에 대한 이의제기나 거부는 예외 없이 ‘불경’이나 ‘교만’으로만 치부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자유나 주권에 대한 순종이라는 명분으로 어떠한 질문이나 이의도 제기할 줄 모르는 인간이야말로 ‘태만’의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욥이나 요나처럼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우' 앞에서 앞에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의를 제기하며 심지어 반항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나라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평생 반복해 거쳐야 할 순례의 여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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