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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사회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 (마르바 던 지음, 복있는 사람 펴냄)

by 서음인 2016. 5. 30.

1.성경에 나오는 “정사와 권세(principalities and power)” 의 의미를 두고 이 개념을 영적 존재 혹은 마귀와 같은 인격적 존재에만 국한시켜 적용해야 한다는 한쪽 극단에서부터 정사와 권세를 비신화화하여 비인격적인 제도나 구조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반대쪽 극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견해와 논쟁이 존재해 왔다. 최근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주목받는 학자 중 한명인 월터 윙크는 이러한 영적 권세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 편만하게 펴져있는 실재로, 제도나 구조 체계와 같이 지상에 구현된 권세의 내적 양상이며, 이러한 영적인 실재들이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 존재들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교회는 이렇게 외적으로 구현된 권세들의 영적 성향을 폭로함으로서 그들의 우상적인 가면을 벗기고 비인간화하는 가치들을 규명하며 그 희생자들을 해방하는 임무를 수행하야 한다고 강조한다.

 

2. 이에 대해 저자는 영적 권세란 현실 속에서 제도나 사회적 구조로 구현된다는 월터 윙크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그들이 물질적으로 육화되지 않더라도 독립적으로 존재를 가질 수 있는 실재이며 따라서 악마적 존재의 계략들에 맞서는 치열한 영적전투는 단지 인간 구조물의 내적 성향과 싸우는 싸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저자는 우리가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것을 정복하셨고 자신의 통치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기 때문이며, (윙크와 같이) 만약 이러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에 확고히 근거하지 않은 구원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단지 해방을 위한 싸움의 차원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악에 대한 이러한 승리는 고립된 각 그리스도인이 아닌 신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실현되어야 하며, 따라서 교회야말로 영적권세들이 계속 제압되는 장소이며 권세들의 최종 운명을 미리 나타내는 영역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3. 교회가 이러한 소명을 성공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tabernacling)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되어 우리의 문화적인 환경에 속한 가치들과 권세들에 휩쓸리지 않고 저항해야 하며,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일하기를 포기하고 우리의 약함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내주를 받아들일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리스도가 고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한 속죄를 성취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세상에 복음이 증거되도록 하셨으며, 따라서 하나님께 필요한 것은 우리의 능력보다 약함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과 교회를 하나님의 내주를 받아들이는 약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힘의 논리로 운영한다면 교회는 그 중심에 있는 십자가를 잃어버리게 되며, 곧 타락한 권세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4. 저자는 오늘날 실제로 수많은 지도자들이 교회성장이나 생존에 대한 관심 때문에 타락한 권세들의 수많은 방법론(경쟁이나 마케팅) 을 수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권력이 아닌 약함을 지향하는 소명이 훼손된 현실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일곱 가지 가르침을 통해 이 약함의 신학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1) 부나 지위나 권력을 추구하거나 현대적 또는 포스트모던 지성에 의해 수용되기를 원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를 主로 선포하는사도들의 가르침 (2) 교회에 도입된 기업경영 원리나 맘몬의 권세에 대항하여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분을 따르는 진지한 헌신인 교제 (3) 우리의 편견이나 취향 계층의식에 대항하여 성찬을 나눌 때마다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우리 주위의 세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계층간의 차별을 제거하라고 요청하는 떡을 뗌 (4) 시류에 휩쓸려 주변 문화의 관점에서 성급하게 사회문제에 뛰어드는 것에 반하여 하나님의 임재 앞에 머물며 우리의 삶과 섬김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과 서로를 위해 그리고 그들이 속한 사회와 세상을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일 (5)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우상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 궁극적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적의 역할을 하는 이적과 기사 (6) 성공이 우리의 신실함의 지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맘몬의 권세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검소한 삶과 후한 나눔을 통한 부의 재분배 (7) 양떼 훔치기나 숫자 경쟁의 수단으로 전락한 예배가 아닌 진정한 환대와 기쁨이 있으며 모든 다른 권세들을 탈신성화하는 예배.

 

5. 교회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적극적으로 정사와 권세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이 싸움의 본질은 우리들의 능동적인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기에 본질적으로 비폭력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전신갑주의 이미지가 가리키는 은유를 잃어버리고 무기 자체에 집중한다면 우리 문화의 타락한 권세 중 하나인 군사주의와 손잡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저자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6. 이 싸움에서 우리의 ‘공격무기’는 다음과 같다. (1) 진리의 허리띠 - 우리가 약함의 위치를 신실하게 지킨다면 우리는 거만한 선언문이나 정치적 술수가 아니라 단순한 말과 진실한 삶이 진리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 의의 흉배 - 교회가 정의를 세우는 두 가지 방법은 사회 질서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베푸는 환대의 제사와 희생자들을 위한 정의 실현이다. (3) 평화의 복음을 선포할 의의 신 - 평화의 복음은 힘이 아닌 교회의 약함이라는 패러다임을 통해서만 선포될 수 있다. (4)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는 믿음의 방패 - 일상생활 속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하고 지속적으로 살아 냄으로 실현되는 계시에 대한 신실성. (5)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해방의 투구 -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일상적인 선한 행동에 헌신된 사람들에 의해 성취되는 해방. (6).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 - 살아 있는 신비가 되는 것, 즉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그런 방식의 삶을 사는 것. (7) 항상 모든 성도를 위해 모든 인내로 모든 종류의 기도를 드림 - 우리가 전신갑주를 취하고 능동적으로 싸움에 참여하고 있지만 거룩한 전사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약한 상태로 님이 있음을 우리에게 계속 상기시킨다.

 

7. 저자가 강조하는 ‘약함의 신학’은 사실 우리에게 낮설지 않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그리스도의 수치와 고난의 십자가이며, 힘과 영광 그리고 권능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기대하는 ‘영광의 신학’은 십자가상에서 유기된 하나님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라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 의 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대한 노트에 기록했던 다음과 같은 결론이 이 글의 결론으로도 가장 적합할 것 같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표적과 지혜를 구하던 옛 유대인과 헬라인들처럼 (고전 1:22) 그리스도를 힘과 영광과 권능의 상징으로 만들고 숭배하면서 도처에서 추악한 바벨탑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고 숨어계신 하나님’을 전파하고 따르는 자들은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스캔들이요,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 (고전 1:23). 만약 오늘날 한국에 루터가 살아온다면 맘몬과 권력과 섹스와 건물을 숭배하는 한국교회에 반대하여 다시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며 (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한다 (Crux probat omnia)’ 라고 외치며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리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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