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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훈련/성경연구단상

사무엘하 (김구원, 홍성사) 23:8-24:25 요약

by 서음인 2023. 3. 11.

39. 다윗의 용사들 (삼하 23:8-39)

 
사무엘하 23vs 역대상 11장     다윗의 용사들의 숫자는 사무엘하 23장에 따르면 36명, 역대상 11장에 따르면 46명이이며, 둘 사이에는 이름과 소속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역대상 11장의 명단은 다윗 통치 시작인 대관식 직후가 그 역사적 배경이며 역대상 12장의 훨씬 더 많은 용사들의 일부다. 사무엘하 23장의 명단은 다윗을 원수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수록되어 있으며 사무엘하 이야기의 결론으로 주어졌다. 따라서 전자는 다윗의 대관식에 참여해 충성을 선언한 사람들이고, 후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다윗에서 충성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전자보다 후자의 숫자가 적은 것은 당연하다.
 
세 용사 23:8-17     (1) 8-12는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 아후히 사람 도도의 아들 엘르아살, 그리고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까지, 첫 번째 세 용사의 이름과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신화적 전투 능력을 짧게 서술한다. 이 명단에는 야훼가 전쟁의 주라는 신학적 인식이 나타나 있으며, 다윗이 아닌 여러 영웅들에게 승리의 공을 돌리는 민주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2) 13-17은 익명의 세 사람**이 다윗에 대한 충성을 입증함으로서 엘리트 용사 반열에 오르게 된 일화를 소개한다. 세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다윗을 위해 블레셋 진영에서 물을 길어온 것이 그들의 충성심을 보여준다면, 다윗이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버렸다는 일화는 용사들과 깊은 연대감을 가진 자비로운 통치자의 전형을 보여 준다.***
 
두 번째 세 용사 23:18-23      스루야의 아들이자 요압의 동생 아비새는 두 번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다윗의 경호대장으로 신화적인 업적****을 남겼고 훗날 아도니야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워 솔로몬의 군대장관이 되었다. 그들은 존경받는 용사였지만 첫 번째 세 용사의 반열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들에게는 다윗에 대한 충성도를 보여주는 일화가 없으며, 이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용사를 구분하는 기준이 전투능력이 아니라 다윗에 대한 충성도였음을 보여준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세 번째 용사는 용맹한 장수였지만 자주 다윗의 뜻을 어기고 아브넬, 압살롬, 아마사 등 다윗이 아끼던 신하들을 암살했던 요압일 가능성이 있다. 그의 이름이 빠진 것은 그의 이름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거나 다윗에게 대적했던 그의 정치적 이력 때문으로 보인다.
 
다윗의 삼십 용사들 23:24-39      본문은 세 사람의 반열에 들지 못했지만 다윗의 30용사에 이름을 올린 군인들의 명단이다. 다윗은 자신의 친위부대를 30명으로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명단이 30명보다 많은 이유는 어떤 용사가 죽으면 다른 용사로 다시 충원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요압의 동생 아사헬 외에 이방인인 암몬 사람 셀렉과 브에롯 사람 나하래, 헷 사람 우리야*****가 포함되어 있다. 실제 명단에 속한 이름은 36명이지만 사무엘서 저자는 용사가 총 37명이라고 말한다. 나머지 한 명은 의도적으로 누락된 것으로 보이는 요압일 것으로 추측된다.
 
주석
 
* 그러나 비평적인 주석가들은 이 명단이 용병에 의존했던 후기와 달리 자신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사람들에 의지했던 다윗의 초창기 시대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 저자는 이들이 앞에서 언급한 첫 번째 세 용사이며, 사무엘서 저자가 이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가 ‘여호와의 말씀’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일화를 말할 때 주인공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유대인 전통 때문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다윗’과 ‘하나님의 말씀’에 거의 동등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일이며, 이는 다윗이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이 시기의 다윗은 권위를 함부로 휘두르지 않으면서 평등주의적 예민성을 가지고 연대감을 개인적 만족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초기의 다윗이다. 
**** 그의 업적 중 구덩이 안에서 사자와 싸워 이긴 것과 베틀채 같은 신화적 무기를 휘두르는 외국 거인을 무찌르는 것은 당시에 널리 인정받던 용사들의 무용담 패턴이었다.
***** 우리야의 이름은 다윗의 권력이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죽어야만 했던 우리야와 같은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40장 다윗의 인구조사 (삼하 24:1-25)

 
다윗의 인구조사 24:1-9      하나님의 진노가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벌이도록 꾀었으며*, 다윗은 군대장군 요압을 시켜 이스라엘과 유다에서 칼을 뺄 수 있는 용사, 즉 전쟁 가능한 남자의 수를 파악하라고 지시한다.** 사무엘서 저자는 하나님의 분노 이유를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으며, 이는 다윗과 같은 인간 통치자가 대면해야 할 세상이 ‘신의 분노로 가득한 세상’임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지파 공동체의 옛 전통을 대표하는 요압과 군사 지휘관들은 신학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로 그 명령에 정당하게 이의를 제기하지만 완강한 다윗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9개월 20일에 걸친 대장정을 거치며 명령을 이행한다.*****
 
역병의 창궐 24:10-15      다윗은 인구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즉시 후회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한 후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갓에게 임하였고, 그는 다윗에게 찾아가 칠 년 동안의 기근과, 석 달 동안 대적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것. 사흘 동안의 전염병 중 한 가지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이 내러티브에서 사무엘서 저자의 관심은 죄와 심판에 대한 신학적 문제가 아니라 백성을 죽게 하는 재앙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었다. 다윗의 선택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임하고 백성들이 살 확률이 가장 높으며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는 사흘간의 역병이었고, 그 결과 7만 명의 백성이 죽었다. 이는 다윗 통치의 한계이자 이 세상에서 인간 통치의 한계를 보여준다.
 
역병을 멈추게 한 제단 24:16-18, 25      자비하신 하나님은 곧 자신이 내린 재앙을 후회하셨고 재앙을 내리는 천사에게 중단을 명령하셨다. 그 후로 이어진 두 번째 죄 고백에서 다윗은 패역과 죄가 백성이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역병이 자신만을 치기를 간구함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자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 그날 갓 선지자가 다윗을 다시 찾아와 천사가 재앙을 거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며, 다윗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이스라엘에 내리던 재앙이 그친다. 이는 하나님의 용서는 거저 주어지지 않으며 생명만이 생명을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제단에서 죽은 양과 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한다.
 
다윗과 아라우나 25:19-24      아라우나는 이스라엘의 원거주민이었던 여부스인으로 아마도 상당히 지위가 높은 사람(왕?)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라우나는 다윗에게 자신의 타작 마당과 번제에 쓸 소를 봉헌하였으나******** 다윗은 제대로 값을 지불하고 정식으로 구입한다. 그렇게 한 이유는 향후 있을 변심이나 분쟁에 대비해 구입을 통해 소유권 이전을 확실히 해놓기 위해서였다. 또한 다윗은 아무런 값도 치르지 않는 희생을 원하지 않았기에 이 땅을 구입했으며, 결과적으로 이 구입을 통해 나중에 그곳에 지어질 솔로몬 성전의 부지를 매입하고 성전의 기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왕이 되었다. 다윗은 죄와 실패로 점철된 흠 많은 인간이었지만 용서받음으로 새 힘을 얻었고,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의 흠결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섭리를 이루신다.
 
김구원 교수의 메시지      사무엘하의 마지막 다윗 일화는 구속사의 예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간 다윗의 통치가 이상적일 것이라는 기대는 그도 죄의 문제로 부서진 인간이라는 사실과 다윗 왕에게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백성들을 살릴 능력이 없다는 사실에 의해 무너져 내린다.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고통 받는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희생제물을 통해 박성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다윗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불완전한 그림자일 뿐이며, 다윗을 통한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구원의 전주에 불과하다.*********
 
주석
 
* 이 본문은 하나님과 악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역대기 기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탄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저자는 유일신 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죄의 기원을 사탄에게 돌리는 것은 낮설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사건의 원인이 하나님으로 특정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과 그 사건 사이의 ‘직접적’ 인과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일반적’ 인과관계로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경우 인간의 자율적 책임과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은 공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무엘서 저자가 다윗을 부추긴 주체를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설정함으로서 신하적 난제를 완화시키려고 시도한다고 말한다.
** 인구조사는 전통적인 지파공동체 사회에 왕의 대리인인 무장한 군대가 전통적인 부족사회인 마을공동체의 삶으로 무자비하게 침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댜윗은 표준적인 근동의 왕처럼 행동한다.
*** 김구원 교수는 이를 왕이나 백성이 특별한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인간의 타락한 실존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TULIP중 하나인 전적 타락?) 그러나 이러한 야훼의 진노는 인간이 예측하거나 조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타자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야훼는 자유롭게 분노하고 자유롭게 용서할 수 있는 분이시다.
**** 신학적 이유는 전쟁의 성패는 하나님께 속한 것일 뿐 사람의 수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며, 정치적 이유는 백성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 다윗에게 보고된 인구수는 이스라엘 80만명, 유다 50만 명으로 역대상 21장 5절에 제시된 이스라엘 110만 명, 유다 47만 명과 차이가 많다. 고고학자들은 당시 이 지역 인구가 30-9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 다윗은 사람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에 떨어지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손’은 역병을 뜻하는 관용어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 떨어졌다면 그의 자비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여기서 하나님의 후회와 돌이키심이 다윗의 회개에 선행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제의에 선행한다는 것과, 제의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 이는 다윗 점령 이전의 예루살렘 군주였던 아라우나가 그의 권리를 다윗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 이 이야기 전체의 핵심은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제의가 어떻게 창설되었으며, 그 아들인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위한 토지를 어떻게 취득했는지 알려 주는 원인론적 이야기(etiology)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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