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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엘륄요더

폭력에 맞서 (자크 엘륄 지음. 대장간 펴냄)

by 서음인 2016. 5. 31.

요 약  자크 엘륄은 폭력이란 필연적인 질서에 속하는 세상의 지배 원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질서에 속해 있는 국가에게 비폭력의 원칙을 강요할 수 없으며, 동일한 질서에 속해있는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 대응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비난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엘륄은 예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그 자유의 영역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의 정당성을 인정하거나 폭력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피압제들 편에 서서 그들의 증인이 되고 압제자들을 향해 급진적인 하나님의 정의의 요구를 선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이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복음에 의해 해방된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세상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그 원리인 폭력의 대로를 따르는 불신앙적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 필연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의 영역과 자유의 나라인 하나님의 영역을  구분하고, 돈 권력(폭력) 프로파간다 기술문명등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원리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는 엘륄의 생각이 잘 드러나는 책이다. 



1.우리 시대의 선지자인 자크 엘륄에 의하면 현대 사회는 거대하고 세계적이며 항상 갱신되는 보편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현대인은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폭력을 타인의 선제적 폭력에 대한 대응폭력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이러한 폭력의 문제에 대해  (1) 국가는 합법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기에 국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법집행이나 전쟁은 폭력이 아니며 정당하다는 주류교회의 입장인 타협 (2)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되며 악한 자에 대한 무저항과 반전 평화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비폭력주의 (3) 압제자들에 대항하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폭력은 신학적으로도 정당하다는 혁명신학의 가르침인 폭력수용 이라는 세 가지의 답변을 제시해 왔다.

 

2. 엘륄은 피압자제들의 편에 서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요구된다는 정치신학의 가르침은 (1) 가난이 몇몇 사람의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체제의 문제이고 (2) 물질적 비참과 불평등이야말로 인간이 직면한 그 어떤 문제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일 뿐 아니라 (3)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도 허용될 수 있고 어떤 제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에 근거한 신학은 결과적으로 폭력의 필연성, 폭력에 참여할 필요성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으며, 이런 경향의 극단적 결과는 오늘날 해방된 인간성에 대한 희망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기독교의 궁극적 가치는 인간화에 이르는 폭력에 동참하는 것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혁명신학의 가르침으로 나타나고 있다.

 

3. 그러나 엘륄에 의하면 폭력이란 (1) 일단 한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으며(지속성) (2) 또 다른 대응폭력을 낳아 끊임없는 폭력의 악순환을 유발하고(상호성) (3) 정당한 폭력과 부당한 폭력, 해방하는 폭력과 속박하는 폭력, 국가의 폭력과 개인의 폭력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동일성) (4) 설령 정의를 가장하더라도 폭력의 본질은 증오와 복수이며 (거짓을 유발함) (5)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을 정당화할 방법을 찾는다는(이데올로기) 특성을 가지는, 필연적 질서의 영역에 속한 세상의 지배 원리다. 따라서 권력에 의한 폭력의 희생자들이 이 세상의 원리에 따라 대응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그리스도들은  그들을 비난할 수 없으며, 동일한 이유로 세상의 필연성의 영역에 속해 있는 국가에 대해서도 비폭력의 원칙을 강요할 수 없다.

 

4. 그러나 엘륄은 예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자유의 영역 가운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나 개인, 압제자나 피압제자, 기독교적 동기나 세상적 동기를 막론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의 정당성을 인정하거나 폭력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며, 복음에 의해 해방된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세상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그 원리인 폭력의 대로를 따르는 불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피압제자들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말씀을 전달하고, 세상에 대해서 피압제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증인이 되며, 압제자들을 향해 급진적인 하나님의 정의의 요구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싸움은 주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여 완벽하게 평화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공포와 물리적인 힘의 폭력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로 선으로 악을 극복하라는 영적인 폭력, 사랑의 폭력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5. 젋은 시절 열왕기 공부를 하던 중 우연히 접한 엘륄의 책 “하나님의 정치 사람의 정치"의 독창적이고 탁월한 통찰에 매료된 후, 나는 엘륄의 팬이 되었고 그의 책이 보이는 즉시 모두 사서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엘륄을 만난 지 이십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그의 책을 펴드는 것은 언제나 결코 편안한 경험이 아니다. 그는 복음의 가르침이라는 급진적인 잣대를 엄격하고도 일관되게 적용하여 교회와 세상의 기성질서를 비판하며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기 때문이다. 보수든 진보든 급진이든 그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개인이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이 책에 나타나는 폭력에 대한 엘륄의 가르침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그 누구에게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겠는가? 월터 윙크가 말했던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에 길들여진 나 역시 국가와 개인, 정의와 불의를 가리지 않고 모든 폭력을 정죄하며 거부하는 그의 주장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과연 그의 가르침이 편안하게 느껴질 날이 올 수는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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