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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엘륄요더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증언 (존 하워드 요더 지음, 대장간 펴냄)

by 서음인 2016. 5. 31.

1.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가 선정한 20 세기를 빛낸 기독교 서적 100권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 名著 예수의 정치학과 몇 권의 소개서를 통해 만난 바 있는, 그래서 내심 어느 정도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부하고 펴든 저자의 이 책은, 그러나 결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전에 읽었던 관련 책들의 도움과 주의 깊은 반복 정독 후에야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2. 요더의 가장 강력한 적수라고 할 수 있는 라인홀트 니버는 인간은 죄악으로 인해 타락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가르치신 완전주의적 사랑의 윤리를 실천할 능력을 상실했으며, 그러한 인간이 본성상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인 국가나 사회 내에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차선책은 정의의 실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타락한 세상 가운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힘(강제력)이 필요하며, 따라서 폭력이나 전쟁도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3. 이에 반해 평화주의자인 존 하워드 요더는 기독교 윤리는 인간의 죄된 현실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의 핵심으로 십자가에서 완성된 비폭력 저항의 정신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정신을 따라 세상 가운데서 모든 종류의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는 철저하고 급진적인 평화주의자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란 개인구원의 길로서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윤리의 기초로서도 타당하며 적실성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된 윤리적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 요더에 의하면 국가는 창조나 구속의 질서가 아니고 섭리와 보존의 질서에 속한다. 즉 국가란 하나님이 선을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적극적으로 제정하신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반역과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허용하신 제도라는 것이다. 요더의 말을 빌리자면 국가의 기능은 “참을만한 이기주의의 균형을 이루는 안정유지”이다. 따라서 어떤 국가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자연법 체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으며, 보존질서에 속하는 국가가 산상수훈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윤리를 따를 것으로 기대하거나 요구할 수도 없다.

 

5. 하나님은 질서유지의 수단으로 국가에 강제력을 허용하셨으며 따라서 아무리 선한 국가라 할지라도 그 본질은 폭력과 칼이다. 그러나 요더는 국가가 폭력사용에 대한 백지수표를 위임받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폭력 행사의 절대적 최소화” 야말로 국가의 의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혼란을 예방하고 질서를 보존하는 사법적 치안적 기능이 아닌 전쟁, 특히 모든 악을 박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십자군 전쟁은 원래의 범죄보다 훨씬 큰 파멸로 이끌며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에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또한 요더는 폭력에 의한 권위는 그 자체로 이미 종교적 주장을 내포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강제력을 그 본질로 가지는 모든 국가는 쉽게 예배를 요구하는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6. 올바른 교회의 사회참여는 “증언”이라고 표현될 수 있으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 비폭력 제자도를 살아내는 길이다. 요더에 의하면 증거와 일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자체가 세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의 메시지이자 교회의 사회참여의 수단이며, 교회가 이러한 비폭력 저항의 삶을 통해 자신의 일차적 과업인 복음전도와 제자도, 그리고 사회적 증언이라는 이차적인 과제를 이 땅 위에서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도래를 위한 길이다. 따라서 요더는 그리스도인들이 칼의 사용을 피할 수 없는 경찰이나 군대와 같은 공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며, 바르트나 본회퍼와는 달리 아무리 악하고 부당한 권세에 대해서도 정치적 반역이나 혁명의 방식이 아닌, 성도의 인내와 신실함으로 고통스럽게 복종하면서 삶을 통한 증언을 통해 저항을 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7. 또한 교회는 특정 국가나 이데올로기의 대리인이 되어 특정 형태의 경제나 사회질서를 지지하거나 이상사회를 만들려는 권력 메커니즘 안에서 하나의 역할을 떠맡으려 해서는 안되며, 기독교적 증언은 모든 악의 총체적 제거나 이상적이고 완벽한 사회를 요구하는 형태가 아닌 구체적인 시공간 안에서 기존의 불의를 향해 외치며 가시적으로 드러난 악습을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 요청과 제안으로 나타나야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기존 사회의 윤리적 사안에 적절성을 지니도록 의미 있고 구체적인 용어로 번역한 “중간공리”에 따라 정부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장 정의롭고 최소한의 폭력적인 활동을 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성취된 도덕적 진보를 선한 삶의 성취나 개인 및 사회구원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요더는 우리에게 강조한다.

 

8. 젊은 시절 손봉호 교수님의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이라는 책을 통해 라인홀트 니버의 사상을 처음 접한 후, '정의의 실현이 사랑의 완성' 이며, 현실 속에서 '최선이 아닌 차악' 을 추구해야 한다는 니버의 이론에 많이 공감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대량학살무기가 보편화되면서 어떠한 전쟁에서도 무고한 인명의 희생을 피할 수 없게 되고, 무엇보다도 “정의로운 전쟁” 이라는 개념이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레토릭으로 전락하는 현실에 직면한 상황에서, 산상수훈과 제자도를 개인 및 사회윤리의 영역에 일관되게 적용하여 비폭력의 메시지를 전하는 요더의 이론이 니버에 비해서 훨씬 성경적이며  매력적인 대안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9. 그러나 과연 요더의 말대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게 최대의 선을 기대하기 보다는 최대의 악과 긴급한 악을 대항하여 투쟁하기만을 요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국가론은 적극적 정의의 실현을 추구하는 복지국가의 이상이나 보편적인 복지의 주장과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이 칼의 사용을 피할 수 없는 군대나 경찰은 물론, 책임윤리를 요구하는 정치적 고위직에 진출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면 요더의 강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이론이 분파적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있는가? 또한 나찌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나 세르비아 르완다 사태와 같은 조직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에 직면해서도, 광주에 진입하여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칼을 휘두르는 계엄군 앞에서도 비폭력 저항만이 그러스도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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