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와 기독교 (자끄 엘륄 지음, 대장간 펴냄)

1.역사적으로 모든 교회는 국가 권력을 지지해 왔으며 권력에 대한 순응주의를 커다란 미덕으로 생각해 왔지만, 우리 시대의 선지자인 엘륄은 이 책에서 성서를 연구하면 할수록 국가에 복종하는 것의 부당함을 깨닫게 되었으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안내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은 무정부주의와 동의어가 아니지만 모든 형태의 정치권력을 거부한다는 면에서 무정부주의적이다.

 

2.엘륄은 폭력이 실제로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기에 성서적 무정부주의란 철저하게 비폭력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권력과 정치란 반드시 부패하며 독재 없이 정치권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정치적 개입도 거부해야 하며, 오로지 양심에 의한 거부, 즉 비폭력 저항의 방법으로 권력에 이의를 제기하며 때로는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저자는 무정부주의의 이상인 국가나 권력이 없는 무정부사회가 실재로 도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무정부주의의 이상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적 저항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상’으로서의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무정부주의이다.

 

3.저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지는 몇 가지 불만들에 대해 대답한다. (1) 모든 전쟁과 갈등의 원인은 종교라는 비판에 대해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예수의 계시와 반대되는 전쟁을 지지할 수 없으며 기독교의 진리는 폭력이나 강압에 의해 부과될 수 없다고 대답하며 (2) 무정부주의자들의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권력에 대한 거부에 대해서는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함 감추시며 인간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추시고 제한하시는 분이시라고 강조한다. (3) 하나님의 존재와 악이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해방한 인간에게는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졌으며 악이란 분열을 책동하는 인간의 행위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결국 기독교가 진정한 모습을 찾는다면 무정부주의자들은 기독교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4.엘륄은 성서를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국가나 권력을 옹호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무정부주의를 제대로 발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출애굽에서 사사 시대 왕정시대를 거쳐 로마 식민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 백성들의 지배적 정서는 反 왕정적이었으며, 이는 ‘반체제 인사’ 인 선지자들의 어록이 정경에 포함되었다는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권력을 거절했으며 경멸했다고 한다. 그에게 정치권력은 조롱의 대상이요 비협조와 무관심의 대상일 뿐이었는데 그 이유는 정치권력이란 모두 마귀에게 속한 것이며, 마귀에게서 받고 마귀를 의지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의 서신에는 순응주의적 본문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악을 행하나 너희는 선으로 답하라는 의미일 뿐 바울서신의 전체적인 기조는 오히려 로마의 권력에 대해 순응하지 말라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을 주로 섬기라는 것이다.

 

5.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정치권력을 포함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국가의 지배와는 다른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성서와 복음 자체가 지닌 무정부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실천해야 할 필요가 있다.

 

6.과연 엘륄의 말대로 정치권력을 포함한 모든 권력이 악마적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권력에 대항한 비폭력 저항만이 허용되어 있을 뿐, 권력의 추구와 정치참여는 어떤 상황에서도 모두 악한 일인가? 정치란 타락한 세상 가운데 최선이 아닌 차악을 찾는 행위이며, 쓰레기통에 핀 한 송이의 장미를 찾는 행위가 아닐까? 니버의 말대로 타락한 이 세상 가운데 가장 큰 사랑은 정의의 실현이 아닐까? 개혁주의의 가르침과 기독교 세계관의 세례를 받고 자란 나는 아직까지도 엘륄의 견해에 100% 선뜻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장로 대통령에 기독교인들이 다수라는 한국의 정치권력에 의해 지난 4년간 자행된 온갖 부정과 사찰, 언론에 대한 탄압의 행태들을 보면 모든 권력은 사탄적인 것이며 절대악이라는 엘륄의 예언이 정말 옳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과연 ‘모든’ 권력은 ‘절대’ 부패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