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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엘륄요더

자끄 엘륄 입문 (신광은 지음, 대장간 펴냄)

by 서음인 2016. 5. 26.

2010년의 리뷰


젊은 날 <하나님의 정치 사람의 정치> 라는 책으로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자끄 엘륄은 나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올라야 할 산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그의 책들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할 뿐 아니라, 독자를 심히 불편하게 만드는 괴력(?)을 가지고 있어 읽기에 결코 편안하지 않다. 탁월한 자끄 엘륄 소개서인 이 책 <자끄 엘륄 입문>을 읽으며 그 불편함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질서(필연의 질서) - 돈, 기술, 국가권력, 종교 - 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다. 이러한 필연의 질서들은 현대 사회에서 영적인 실체로 우리에게 경배를 요구하는 우상이 되고 있으며, 철저하게 악마적이기에 결코 기독교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기독교가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이며 또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리차드 니버와 개혁주의의 전통에 기초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관점과 궤를 달리한다. 이러한 세상의 질서에 대한 극단적인 비관론과 급진적이고 우상파괴적인 비판이야말로 우리가 그에게서 느끼는 불편함의 첫번째 실체일 것이다. 오늘날 신성한 아우라를 획득한 돈, 기술, 국가, 종교가 모두 전혀 성화의 가능성이 없는 사탄의 영역이라니!!


폭력이나 혁명을 포함한 우리의 어떠한 행위라도 이 세상의 필연의 질서를 변화시킬 수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제한적이나마 이 세상 가운데서 자유를 누리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파루시아와 함께 올 완전한 자유의 도래를 소망하면서, 철저한 사랑의 혁명과 기도 그리고 철저한 비폭력의 실천을 통해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고 급진적으로 자유의 질서를 살아내야 한다. (이 점에서 그는 메노나이트 신학자인 존 하워드 요더를 닮았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세상을 정복하거나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복음 사이에서 지속적인 내적 투쟁과 긴장을 겪는 역설적 변증법의 길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필연의 질서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급진적 제자도의 실천을 요구하는 그의 주장이야말로 우리가 그에게서 느끼는 불편함의 두 번째 실체일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살아가는 나는 엘륄에 대해 더욱 불편함을 느낀다. 내가 그의 책을 감히 다시 들 수 있을까? 갑자기 세속적인 긍정의 심리학과 성공 이데올로기가 “성공과 번영의 복음” 포장되어 팔리는 오늘의 세태에 대해 그가 무엇이라고 할 지 궁금해진다.


2014년의 생각


아직까지도 엘륄에 대한 제 느낌은 ‘불편함’입니다. 


(1) 그 첫 번째 이유는 2010년 리뷰에도 적었던 것처럼 세상의 질서를 전적으로 거부하는 엘륄 특유의 비관주의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게서는 존 스토트나 C.S. 루이스 같은 영미권 저자들이나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화란 개혁주의자들의 심성 기저에 깔려 있는 낙관적 확신의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스토트가 복음을 가르치는 견실한 교사요, 루이스가 복음을 재미있게 풀어주는 이야기꾼이며, 카이퍼가 복음을 따라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가라면, 엘륄은 복음과 어긋나버린 세상에 심판을 선포하는 선지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불편함의 두 번째 이유는 그의 ‘뿌리없음’입니다. 그를 보수나 진보, 신학자나 사회학자, 또는 특정 학파나 종파와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프레임에 끼워맞추려는 시도는 언제나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아나뱁티스트 전통과 가장 가까워 보이기는 합니다) 엘륄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지만, 과문한 탓인지 학계에 ‘엘륄 학파’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는 어떤 계보에도 속하지 않은 선지자 멜기세덱이나 홀연히 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후 사라져버린 엘리야를 닮았습니다. 


(3)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세상을 정복하거나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복음 사이에서 지속적인 내적 투쟁과 긴장을 겪는 역설적 변증법의 길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사랑의 혁명과 기도 그리고 철저한 비폭력의 실천을 통해 세상의 질서를 거부하고 급진적으로 자유의 질서를 살아내야 한다” 는 그의 결론은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내적 긴장과 외적 투쟁을 요구합니다. 이런 엘륄을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 어찌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모르죠, 혹시 미친다면 엘륄이 편안하게 느껴질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직까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2016년의 깨달음


그간 몰랐던 엘륄의 뿌리를 마침내 찾게 되었습니다, 바로 칼 바르트입니다. 엘륄의 <요한계시록 강해>를 읽으며 마치 칼 바르트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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