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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C.S. 루이스 외

시편사색 (C.S. 루이스 지음, 홍성사 펴냄)

by 서음인 2016. 5. 31.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경건의 시간(QT) 교재는 월요일마다 시편을 묵상하도록 짜여져 있다. 하여, 매주 월요일마다 꼬박꼬박 접하는 이러저러한 시편들은 격려와 위로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당혹감과 함께 수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아마추어인 저자가 시편과 만남을 통해 일어난 상념을 기록한 책”이자 “처음에는 좋아할 수 없었던 시들과의 만남을 통한 상념을 기록한 책”인 C.S. 루이스의 시편사색은 이러한 당혹스러운 질문들에 대해 ‘아마추어이자 평신도’인 한 위대한 기독교 지성인이 도달한 하나의 결론이다. 시편을 전공한 구약신학자 김정우 교수님은 총신대학출판부 판의 서문에서  “내가 가진 학문적 도구를 가지고 결코 루이스의 사색에 도달할 수 없기에 이 책을 번역하기로 하였다” 고 쓰고 있다. 물론 어떤 책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저자의 결론에 100% 동의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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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없다는 것, 특히 우리가 의분이라고 부르는 분노가 없다는 것은 끔찍스러운 도덕적 불감증의 증상일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이교도들보다 더 지독한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면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선과 악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뜻이며, 분노를 일으킨 일 자체가 명백히 잘못된 일이요 그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편 기자들의 가차 없는 태도는 현대에 이르러 기독교적 사랑으로 통하고 있는 태도들보다 진리의 모습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러나 그런 분노는 자신의 가장 악랄한 감정조차 거룩한 감정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훨씬 끔찍한 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 초자연이 들어오면 좋은 쪽과 나쁜 쪽 모두를 향해 새로운 가능성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경건과 사랑과 겸손을 향해 나아가는 길과 영적 교만과 자기 의와 박해의 광기로 나아가는 길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를 훨씬 더 나쁜 존재로 만듭니다. 무자비한 광신도가 되는 사람은 소인이 아니라 위인이나 성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며, 온갖 악인들 중에서도 가장 악한 사람은 종교적 악인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은 그 자체로는 종교적 주제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이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되 사람들에게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이 그들의 참된 목적이요 만족이라는 사실을 계시하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이 주실 수 있는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계시하기 시작하셨을 때 내세의 복이나 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시지 않은 것은 필연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너무 빨리 믿게 되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욕구를 계발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종교적인 희망과 두려움은 독자적이고 자립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신앙에 뒤따라오는 필연적인 결론으로 나중에 계시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에서 온전히 하나님 중심적이며 그 어떤 선물보다도 하나님 자체를 더욱 갈망하는,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의심할 나위 없이 진짜인 어떤 경험을 발견합니다. 우리에게는 시편에서 만나는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즐거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이 몰랐던 ‘영혼을 구속하기 위한 대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축제는 그 찢긴 몸, 흘린 피와 더불어 시작되고, 거기에 중심을 두고 있기에, 우리의 예배에는 유대교에는 없는 비극적 깊이가 더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비극적 깊이와 공존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기쁨이며, 유대교가 갖고 있는 단순한 기쁨의 멜로디 위에 영적인 대위선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악한 사람과 교제를 피하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나 자기 의가 아닌 신중한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 지낼 수 없을 만큼 우리가 ‘너무 선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도 좋을 만큼 우리가 충분히 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이렇게 본다면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는 ‘위험한 줄 알면서도 우리가 원할 때가 많은, 어깨가 으쓱해지는 초대, 흥미로운 만남, 화려한 시류에 편승하는 일 등을 제게 허락하지 말아 주십시오’ 라는 뜻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과 자연을 묶어 주는 말임과 동시에 그 둘을 떼어놓는 말입니다.... 이처럼 창조 교리는 우선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 냅니다. 그러나 창조 교리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자연에서 신성을 벗겨 내는 그 교리는 또한 자연을 참된 신성을 가리켜 주는 표시, 상징, 현시로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자연에서 신성을 제거함으로서 오히려 여러분은 자연을 참된 신성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 ‘감탄(찬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은 그런 감탄이 그 작품에 대한 올바르고 적합하며 알맞은 반응이라는 것, 그런 감탄은 ‘낭비’가 아니라는 것, 감탄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고 무감각한 사람이요 무언가 큰 것을 놓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칭송을 받으실 대상입니다. 반대로 그분을 칭송하지 못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경험을 놓쳐 버리는 것이요, 결국 모든 것을 놓쳐 버리는 것이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완벽하게 찬양할 수 있다면, 우리 안에 터질 듯 솟아오르는 감흥을 완벽하게 표출할 수 있다면....그때는 실제로 그 대상의 진가가 완전하게 인정되는 것이요, 우리의 즐거움도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이는 ‘천국’을 인간들과 천사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상태로 말하는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식입니다”

 

“모든 구약성경은 다른 문학들과 똑같은 재료들로 이루어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임 받게끔 하나님에 의해 들어올려진 것입니다. 이 재료들에서는 인간적인 특성들 - 순진한 무지, 오류, 모순, 악독함 - 이 두루두루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 자체가 오류 없는 과학이나 역사를 말해 준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어 나릅니다. 우리는 그 말씀들을 모아 하나의 체계 속으로 정리해 넣을 수 없습니다. 체계는 섬광처럼 지나가는 그 빛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체계화하는 우리의 지성에) 그렇게 알쏭달쏭한 것은...우리가 전인적인 응답을 하게 만들고, 지금 우리는 어떤 학과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 속에 자신을 푹 담금으로서 새로운 시야와 기풍을 얻고, 새로운 공기를 호흡하며, 그분의 방법대로 우리 안에 허물어진 그분의 형상을 다시 세우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맡겨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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