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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C.S. 루이스 외

헤아려 본 슬픔 (C.S. 루이스 지음, 홍성사 펴냄)

by 서음인 2016. 5. 27.

이 작은 책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 63세에 암으로 투병 중이던 사랑하는 연인 조이와 결혼한 루이스가, 그녀를 먼저 떠나보낸 후 찾아온 깊은 비탄과 회의의 감정과 정직하게 대면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한 결과물이다.  60 평생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만나게 된 진실한 사랑을 너무도 빨리 빼앗겨 버린 엄청난 상실의 경험 앞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기독교 지성인이자 변증가라는 이 사나이가 한때 그렇게도 확신했을 뿐 아니라 탁월하게 변증해 왔던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의심하면서 하나님께 발버둥치며 대드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또한 ‘믿음’이라 불리우는 회칠한 무덤 뒤에 의심과 고통을 깊이 묻어둔 채 아닌 척 살아가는 ‘넓은 문’을 택하는 대신, 자신에게 닥친 슬픔과 고통을 용감하게 맞대면하고 치열하게 성찰하면서 해답을 찾아가는 그의 모습에서  신앙은 ‘정직한 회의’와 ‘치열한 성찰’ 이라는 자양분을 통해서만 더 깊은 성숙의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여러분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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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없다. 그저 잠긴 문, 철의 장막, 텅 빈 허공, 절대적인 무의 세계만 있을 뿐. ‘구하여도 얻지 못하리라.’ 구하다니 내가 바보였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 오 하나님, 하나님이시여. 제가 다시 껍질 속으로 기어서 들어갈 운명이라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간 운명이라면 왜 이 피조물을 그 껍질에서 나오도록 애써 끌어내셨나이까...”


“진짜 위험이란 그분에 대해 이처럼 끔찍한 사실들을 믿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것이 하나님의 실체인 거야.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마.’ 그녀는 언제나 하나님 품 안에 있었으며 나는 하나님의 손이 그녀에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봐 오지 않았던가? 우리가 육신을 벗고 나면 하나님이 갑자기 더 다정하게 대해 주시기라도 한단 말인가? 하나님이 ‘선한 분’ 이라는 믿음은 우리의 절망적인 희망사항일 뿐 그 밖에 무슨 근거가 있는가? 나쁜 신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가? 어쨌든 그처럼 나쁜 점을 가지고 있는 신을 믿는 것이? 우주를 다스리는 가학적인 신, 악의에 찬 얼뜨기를?”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그녀의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연인이라니, 나는 얼마나 덜된 인간인가? ‘돌아와 주오’ 라며 미친 듯 부르짖는 외침조차도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나는 나의 과거를 복원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알겠다. H에 대한 내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내 믿음과 거의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둘 다 카드로 만든 성채였다...”


“상상 속 내 믿음은 ‘질병’ ‘고통’ '죽음‘ ’외로움‘등으로 이름 붙여진 가짜 돈으로 계산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밧줄이 나를 지탱해 줄지 어떨지 문제가 되기 전까지는 그 밧줄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것이 문제가 되자, 믿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하나님이든 아니든, 선한 신이든 가학적 신이든, 영생이든, 비존재든 그에게 아무 것도 걸지 않으면 진지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다가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할 순간이 되어서야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한 사태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다. 만약 내 집이 카드로 만든 것이었다면 한방에 빨리 날려 보내는 것이 더 좋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고난을 겪음으로서만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의 가학적인 신이나 생체 실험하는 신 따위는 불필요한 억측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토록 극단적인 고통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가? 스스로 선택할 일이다. 고통은 일어난다. 만약 그 고통이 불필요한 것이라면, 신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악한 존재일 것이다. 만약 선한 신이 계시다면, 이러한 고통은 필요한 것이다...... ‘만약 그녀 대신에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견디겠건만.’ 그런 일은 오직 한 분에게만 허용되었다고 우리는 배웠으며, 그렇게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그분이 대신 행하셨음을 나는 다시금 믿는다. 그분은 우리의 실없는 소리에 이렇게 응답하신다. ‘너희는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감히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나는 그리 할 수 있었으며 감히 감당하였다’....”


“이 세상 모든 연인들에게 예외 없이 사별이란 사랑의 경험상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연예 다음에 결혼이 오듯이, 결혼 다음에는 자연히 죽음이 온다. 그것은 과정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여러 단계들 중의 하나이다. 춤이 중단된 게 아니라, 그 다음 양식으로 옮겨 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연인 덕분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다음에는 춤의 비극적인 양식에 따라 우리는 여전히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비록 그 육신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어도 연인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의 과거의 추억, 슬픔 혹은 슬픔으로부터의 위안, 자신의 사랑 따위를 사랑하느라 안주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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