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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저자/C.S. 루이스 외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C.S. 루이스 지음, 홍성사 펴냄)

by 서음인 2016. 5. 28.

1. 이미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C.S. 루이스의 이 유명한 책은, 지옥의 고관인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초보 악마인 자신의 조카 웜우드에게 보낸 편지 - 막 기독교에 입문한 그의 ‘환자’를 원수(하나님) 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위한 훈계와 책망을 담은 - 라는 형식을 빌어, ‘지옥’의 관점에서 바라본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을 재치 있게 그려낸 탁월한 변증서다. 루이스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인간의 끝없는 죄성이라는 고전적이고 딱딱한 신학적 주제를 생생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바꾸어 내는 데 성공했으며, 전통적이고 건조한 '영적 훈계'를 문학이라는 틀을 통해 창조적으로 재현하여 새롭고 신선하게 제시하고 있다.

 

2.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루이스의 신앙, 소위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가 본질상 매우 보수적이라는 사실이다. 평생 영어권 세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는 그의 신앙은 철저히 20세기 초중반 영국 중산층의 정서와 윤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역사비평이나 역사적 예수와 같은 당대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개인적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상력과 이야기의 힘을 빌어 기독교의 핵심적 메시지를 탁월하게 변증해 낸 루이스의 작품들은 그를 여전히 우리 시대에 적실한 예언자요 변증가로 남아 있게 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말마따나 C.S. 루이스는 진정 “교회의 小 예언자이자....당대의 이단들에 맞서 세련미를 발휘해 유행에 뒤떨어진 정통의 정당성을 내세운 신앙의 옹호자” 였으며, “이야기와 상상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여 신앙을 풍성하게 하고 확장시키되....복음의 합리적 본질은 놓치지 않은” 위대한 변증가였다.

 

본문 맛보기

 

자유  원수(하나님) 가 이런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이유는, 이 구역질나고 하찮은 인간 버러지들을 이른바 ‘자유로운’ 연인이자 종 - 원수가 쓰는 말로 하자면 ‘아들’ - 으로 삼겠다는 망측한 환상을 품고 있기 때문인데, 이 두 발 달린 짐승들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집요한지......원수는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인간 앞에 욕망을 세워놓고도 단순한 감정이나 습관을 이용해서 끌고 갈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지. ‘제 힘으로’ 해 내도록 내버려 두겠다는 게야....우리는 비어 있어 채워져야 하지만 그는 충만해서 넘쳐 흐른다. 우리의 전쟁 목적은 저 아래 계신 우리 아버지(사탄) 께서 다른 존재들을 모조리 삼켜 버리는 세상이지만, 원수가 바라는 것은 원수 자신과 결합했으면서도 여전히 구별되는 존재들로 가득 찬 세상이야.

 

선과 악  네가 아무리 힘을 써도 환자의 영혼에는 어느 정도의 악의와 함께 어느 정도의 선의가 있게 마련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매일 만나는 이웃들에게는 악의를 품게 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미지의 사람들에게는 선의를 갖게 하는 것이지. 그러면 악의는 완전히 실제적인 게 되고, 선의는 주로 상상의 차원에 머무르게 되거든. 만약 환자가 제 어머니나 고용주나 기차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 따위를 사랑하는 몹쓸 버릇을 기르게 된다면, 독일군에 대한 증오에 아무리 기름을 퍼붓고 부채질을 해 봤자 전혀 쓸모가 없다.

 

미덕  인간의 미덕들이 우리에게 치명상을 입히려면 반드시 의지의 차원에 도달해서 습관으로 자리잡아야 하지. 미덕들이 공상 속에서 아름답게 채색되고, 지식인들의 인정을 받으며, 어느 정도의 사랑과 존경까지 끌어모은다 한들, 그걸로 우리 아버지(사탄) 집을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미덕들을 가지고 지옥에 오는 인간이야말로 훨씬 더 재미있는 구경감이지......네 환자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두거라. 상상과 감정이 아무리 경건해도 의지와 연결되지 않는 한 해로울 게 없다. 느끼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질수록, 점점 더 행동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결국에는 느낄 수도 없게 되지.

 

쾌락  어떤 쾌락이든 건전하고 정상적이고 충만한 형태로 취급하는 건, 어떤 점에서 원수를 유리하게 하는 짓임을 잊지 말거라. 우리가 쾌락을 사용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포획해 왔다는 건 나도 안다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쾌락은 원수의 발명품이지 우리 발명품이 아니지 않느냐? 원수는 쾌락을 만들었지만, 우린 지금껏 수없이 많은 연구를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쾌락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원수가 만들 쾌락들을 인간이 즐기게 하되, 단 원수가 금지한 때에, 원수가 금지한 방식과 수준으로 즐기도록 유인하는 게 고작이야. 쾌락은 감소시키고 그에 대한 갈망은 증가시키는 게 우리가 쓰는 방식이지.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것’ 이야말로 정말 강하고말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슬쩍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인간은 달콤한 죄도 못 되는 것, 도대체 뭔지도 모르고 왜 하는지도 모를 것에 미적지근하지 관심을 보이다말다 하거나 자기도 잘 모르는 어렴풋한 호기심을 채워 보다가......일단 우연히라도 발을 디디고 나면 도저히 빠져 나오기 힘든, 그 길고도 어둑한 몽상의 미로에서 헤메다가 인생을 낭비한다....명심하거라. 아무리 사소한 죄라도 그것이 쌓여 인간을 ‘빛’으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조금씩 끌어올 수만 있다면 그만이야. 사실 가장 안전한 지옥행 길은 한 걸음 한 걸음 가게 되어 있다. 그것은 경사도 완만하고 걷기도 쉬운데다가, 갈래길도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는 길이지.

 

현재  원수의 이상형은 하루종인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일한 다음, 그 일에 관한 생각을 깨끗이 털고 결과를 하늘에 맡긴 채 그 순간에 필요한 인내와 감사의 마음으로 즉시 복귀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미래에 잔뜩 가위눌린 인간, 이 땅에 금방이라도 천국이나 지옥이 임할지 모른다는 환상이 사로잡힌 인간, 그래서 천국을 얻을 수 있다거나 지옥을 피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원수의 계명을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이 최고지. 우리가 바라는 건 전 인류가 무지개를 잡으려고 끊임없이 쫒아가느라 지금 이 순간에는 정직하지도, 친절하지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사는 것이며, 인간들이 현재 제공되는 진정한 선물들을 미래의 제단에 몽땅 쌓아 놓고 한갓 땔감으로 다 태워 버리는 것이다.

 

시간  너는 열심을 다해 ‘내 시간은 나의 것’ 이라는 그 기묘한 전제가 환자의 마음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꼭 틀어막아야 한다. 마치 자신이 하루 24 시간의 합법적인 소유자로서 매일의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라고.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자기 재산에서 억지로 떼어 주어야 하는 부담스런 세금으로 여기게 하고, 종교적인 의무들에 할애하는 시간은 너그러운 기부금으로 여기게 하거라.....그러나 인간은 시간 중에서 단 한 순간도 만들어 내거나 붙들어 둘 수 없다. 시간이란 순전히 선물로 주어진 것이지. 시간이 저희들 것이라면 해나 달도 저희들 소지품이게?.....인간이 완전히 소유했다는 의미에서 ‘내 것’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나온다. 종국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 특히나 모든 인간에 대해 원수나 우리 아버지 둘 중의 한 편이 ‘내 것’을 주장하게 될 게다.

 

만남  놈은 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존재 자체까지도 의심했다. 그런데 막상 신을 만나는 순간, 자기가 처음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기 혼자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삶의 시간 시간마다 그가 어떤 역할을 해주었는지도 깨닫게 되었단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 “당신은 누구시죠?” 라고 묻는 대신 “바로 당신이었군요”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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