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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주석강해

빌립보서 -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박영호 지음, 홍성사 펴냄)

by 서음인 2024. 2. 6.

이 책은 전 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였고 현재는 포항제일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영호 목사님이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로 낸 빌립보서 주석이다. 이 시리즈는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되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일반 성도들도 읽을 수 있는 주석을 지향한다. 사용해 본 경험에 따르면 이 시리즈는 BST와 비슷하게 강해와 주석 사이에 위치하지만, BST 시리즈보다는 조금 더  ‘주석’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려있는 것 같다.
 
저자는 빌립보서가 곧 순교를 맞이할 바울이 투옥기간의 마지막 수개월 혹은 수주 전에 로마 감옥에서 기록한 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재정지원에 대한 감사를 담고 있는 기쁨과 우정의 서신이라는 기존 견해와 달리, “생애 마지막 순간에 순교의 사명과 살아서 빌립보 교인들을 만나고 싶어했던 격정 사이를 오가며 쓴 노사역자의 마지막 심정”을 담고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면 빌립보서를 쓸 당시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과 로마교회로부터도 외면 받고 있었으며, 애정을 쏟았고 밀접한 관계였던 빌립보 교회와도 갈등이 있었다. 이 서신은 이러한 문제들에 맞선 바울이라는 한 인간의 치열한 고뇌와 투쟁 속에서 탄생했다.
 
이 주석의 가장 큰 특징은 빌립보서를 그레코-로만 사회의 맥락과 동시대 수사학의 눈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바울의 태도는 초연함과 평정심을 특징으로 하는 소크라테스나 세네카의 ‘고귀한 죽음’과 유사하지만, 이들과 달리 자신의 죽음 뒤에 남겨질 공동체의 안위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서 헬레니즘 문화를 넘어서는 기독교적 이상을 구현한다. 또한 저자는 바울서신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본문을 신학적 의미를 추출하기 위한 증거 본문(proof text)의 다발로 여기는 기존의 방식보다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수사적 기교나 구도를 주의 깊게 살피는 일이 더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사회학적-수사학적 읽기는 기존의 신학적 읽기보다 훨씬 풍성한 이해를 제공할 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도 바울서신을 접하는 흥미로운  접촉점이 될 수 있다.
 
저자는 빌립보서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대적이 율법주의자나 방종주의자 등 다양한 그룹이지만 그들 모두는 예수를 믿으면 고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겪지 않아야 한다고 여기는 ‘승리주의’ 혹은 ‘번영신학’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이 당한 박해는 정부에 의한 조직적 박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사회적 소외와 경제적 손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한  “착한 일”을 새창조와 우주적 승리라는 폭넓은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과 “율법”을 정체성 표지로 정의하는 것, “그리스도의 믿음”을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번역하면서 칭의를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저자의 바울 이해는 새관점(NPP) 학파에 근접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빌립보서 전체를 지배하는 바울의 신학적-목회적-윤리적 원리는 그리스도 찬가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kenosis), 자발적 포기이다. 그리스도께서는 “cursus honorum”(명예의 코스)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cursus pudorum”(비천함의 코스)를 지향했으며, 이는 에바브로디도를 모범으로 제시하는 바울의 수사적 전략 및 바울을 향한 빌립보 교인들의 후원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모두는 빌립보서의 윤리적 핵심인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으로 귀결된다. 겸손한 마음이 미덕으로 제시된 경우는 그리스도교 이전 그리스 로마 문헌 어디에도 없으며, 서양 정신사에서 겸손이 미덕 중의 하나로 등장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공헌이다.
 
빌립보서에 나타난 마울의 소망과 확신은 현실 속에서 실패로 귀결되었다. 바울은 기독교회 내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외롭게 살았고 빌립보서를 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2세기 초에 이르면 바울은 1세기 그리스도인 중 가장 중요한 스승이자 사도 중의 사도로 인정받게 되며, 이는 바울이 남긴 편지들이 기독교 그룹 내에서 폭넓게 사랑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빌립보 교인들이 이 편지를 살아 있는 사람의 편지에서 순교한 사람의 편지로 읽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이 전환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시점이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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