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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사회

평화의 얼굴 (김두식 지음, 교양인 펴냄)

by 서음인 2016. 5. 31.

1.이 책의 모태가 된 “칼을 쳐서 보습을”을 통해 한국의 기독교계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평화주의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했던 저자는, 우리가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은 쉽고도 안전한 일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순간 ‘위험과 고난으로 가는 차표’가 예약된다고 말한다. 평화주의란 모든 형태의 전쟁을 거부하는 것(Anti-war-ism)을 의미하며,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곧 법적인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2. 저자는 비폭력과 원수 사랑을 강조한 산상수훈과 십자가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사역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평화주의라고 부르는 바로 그 길이었으며, 초대교회는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평화주의적 입장을 고수했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기독교가 국가 종교가 된 후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이론으로 대표되는 정당한 전쟁론이 기독교의 공식 입장으로 자리잡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성직자들은 무기를 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직업군인이 아닌 일반인들은 전쟁참여의 기회가 없었기에 실제로는 개인이 평화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종교개혁기 이후로는 재세례파로 대표되는 소수의 평화주의 교파들이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그들의 평화주의적 신념을 꿋꿋히 지켜 왔으며, 현대 한국의 복음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존 스토트 목사와 대천덕 신부, 그리고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스포크 박사 등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류 기독교 내에서도 평화주의의 흐름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3. 그러나 저자는 70년에 걸쳐 1만명의 병역거부로 인한 수감자가 생겨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동안 가혹하게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자를 처벌해온 나라인 한국에서는 이 문제가 이슈화되는데 실패해 왔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로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병역이 신성화된 것과 거의 모든 병역거부자들이 이단으로 치부되는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것을 꼽는다. 군사독재정권의 ‘병역척결의지’ 와 한국 기독교의 ‘이단척결의지’가 절묘하게 결합해 양심의 자유라는 인권의 이슈인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권을 철처하게 묵살하고 탄압해 왔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분단상황이라는 한국의 특수성을 지적하며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위에서 언급했던 존 스토트나 대천덕 신부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는 실제 2차 세계대전중의 미국이나 영국 등 전쟁 중인 나라에서 시행되기 시작했으며, 이스라엘이나 대만같이 준전시상태인 국가들에서도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특수성을 강조하며 양심의 자유라는 보편적 인권을 부인하는 행위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가치를 포기하자는 모순이요, 군사독재의 논리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평화주의와 반대라고 생각하는 정당한 전쟁론은 실제로는 결코 평화주의와 멀지 않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왜냐하면 정당한 권위(주권국가)와 정당한 이유(권선징악) 그리고 올바른 의도(욕심의 배제)라는 정당한 전쟁론의 잣대를 들이대면 실제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전쟁이란 거의 없으며, 특히 모든 전쟁이 전면전화되고 대량살상무기가 전장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후로 무고한 인명의 희생이라는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어진 정당한 전쟁론의 입지가 극히 좁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실제 현실 속에서 평화주의자들과 정당한 전쟁론자들이 부딪힐 일은 거의 없으며, 20세기 정당한 전쟁론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라인홀트 니버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짜 정당한 전쟁론자는 이러한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기에 평화주의자에게 관용적이라고 말한다.

 

4. 저자는 UN 결의에서도 나타나듯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는 세계적으로 이미 비전투부대 복무 혹은 민간대체복무 인정이라는 해결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실제로는 병역특례라는 제도를 통해 광범위하게 대체복무가 인정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제도의 보완을 통해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로 인해 법정에 서고 감옥에 가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들에게 대체 복무나 비전투임무 종사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서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5. 정당한 전쟁론과 평화주의는 기독교 내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현재도 활발하게 진행중인 논쟁의 주제이다. 이 문제에 관한 내 입장은 평화주의의 가르침에 점점 더 끌리면서도 아직까지는 “그러나 나는 인간 역사에 더 큰 살상을 막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필요했고 또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았던 순간들이 드물게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이런 결론에 못내 마음이 불편하고 꺼림찍한 것이 사실이다” 라는 스캇 팩 박사의 견해와 조금은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라면 현실 속에서 온갖 박해와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 가운데서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평화주의자들을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라고 함부로 매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현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이끌어간다고 큰소리쳐 왔지만, 실제로 세상을 바꾸어 왔던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천하기 위해 불가능한 것을 꿈꾸어왔던 바보들이 아니었던가?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서 용서와 화해, 평화의 이상을 포기하는 순간 ‘폭력에 의한 정의’만이 세상 가운데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정의가 되며, 고난받는 하나님이 친히 지고 가신 화해의 십자가가 사라진 자리에는 신학자 월터 윙크가 말한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 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요 희망으로 남게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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