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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사회

머튼의 평화론 (토마스 머튼 지음, 분도출판사 펴냄)

by 서음인 2016. 5. 31.

1.평화의 시대에 평화를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증오와 폭력,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시기에 평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고난을 자처하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영성가요 이미 영성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칠층산”의 저자이기도 한 토마스 머튼 신부라고 해도 예외일 수는 없었나보다.  메카시의 광풍에 이어 냉전의 공포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60년대 초에 씌어진 이 핵 평화주의에 관한 에세이들은 결국 그가 속한 수도회의 반대로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40년이 지난 2004년에야 정식으로 출간될 수 있었다.

 

2. 저자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주의라는 거악을 막기 위해 핵전쟁이라는 차악이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실제로 그러한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학을 찾으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저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으로 인류와 생태계의 파멸을 초래할 수 있는 핵전쟁은 어떠한 목적과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절대악일 뿐이며, '제한적인' 핵전쟁을 추구하는 것보다 온전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욱 더 복음적이고 인도적일 뿐 아니라 심지어 더 현실적인 길이라고 강조한다. 핵무기로 유지되는 ‘공포의 균형' 이란 부도덕하고 비인도적이며, 사소한 실수나 마찰로도 인류의 파국을 초래할 수 있는 극히 연약한 지반위에 서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3. 저자에 의하면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란 단순히 당대 로마의 지배이념인 ‘로마 지배하의 평화(pax romana)’ 사상을 종교적으로 인준하는 수준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특별한 성령의 은사이자 이 세상에 주님이 현존하심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따라서 분열과 갈등과 전쟁이라는 ‘옛 삶’의 질서를 떠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평화의 왕국에 소속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세상 중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교부 오리게네스에 의하면 "기도라는 무기는 인간들을 분열시키고 싸우게 하는 악의 세력 그 자체를 겨냥하기 때문에, 평화의 보존을 위해서는 전투에 참여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무기를 들고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서 국가를 섬긴다."

 

4. 저자는 현실 속에서 전쟁은 가끔 불가피한 필요악일 수 있기에  ‘정당한 전쟁’ 이 완전히 부조리한 것은 아니라고 말함으로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정당한 전쟁' 의 정당성과 현실적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에 의하면 실제로는 역사적으로 정당한 전쟁이론이 준수된 전쟁의 예는 거의 없었으며 설령 어떤 전쟁이 정당한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전쟁의 광기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비인도적인 잔혹성에 사로잡히게 되면 거의 모든 경우에 불의의 전쟁으로 변질되고 만다. 더구나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 무기가 일상화되고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공격과 특히 인류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핵전쟁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오늘날 이 이론은 더 이상의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5. 핵무기 현실론자들은 가장 냉정하고 예외 없는 비타협적 핵무기 정책만이 평화와 질서를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주장하며, 적에 대해 철저히 냉혹하지 않은 사람은 순진한 바보일 뿐 아니라 자유정신에 대한 반역자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와 같이 더 큰 선을 위해 작은 악을 허용할 수 있다는 원칙위에 그리스도교 윤리 체계를 구축하려는 현실주의자들에 대해 십자가와 희생이라는 복음과 초대교회의 정신이 도대체 어디로 갔느냐고 반문한다. 현실 속에서 가장 정통적이고 가장 경청받으며 가장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예언자는 더 새롭고 더 크고 더 정교한 무기체계를 제안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들이야말로 참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눈먼 바보들일 뿐이다. 구약의 지혜서에서 도덕관념이 없는 기회주의적인 인간을 바보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6. 저자는 냉전시대의 종교가 가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의 자멸적 성향에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자기 합리화의 외양을 덧입혀 주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핵 선제공격을 가하는 한이 있더라도 서구를 방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필요한 차악일 뿐 아니라 심지어 고귀한 행위이며, 공산치하에서 생존하는 것보다는 핵으로 인한 전 인류의 파멸을 택하는 길이 용감하고 고결하며 심지어 그리스도인다운 결정이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쟁하는 양측을 모두 패배시키고 결국 파멸로 이끄는  핵전쟁의 이데올로기 앞에 무기력하게 굴복한다면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들을 수호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수 밖에 없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7. 또한 이러한 양자택일의 강요는 평화롭게 하나 된 세상을 위한 끈기 있는 노력과 희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이며, 단호하고 영웅적인 것처럼 들리는 그들의 주장은 사실 인간 죄성의 근저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증오와 불신과 광기를 불러내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의 복사판일 뿐이다. 저자에 의하자면 그들은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이상이 평화적 가치로 수호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절망적 패배주의자들일 뿐 아니라 병적인 증오와 광기에 사로잡혀 인종청소와 같은 극단적 해결책에 집착한 히틀러와 동일한 사고 구조를 가진 자들이며, 만약 우리가 그들을 따라 증오의 정책을 추구하거나, 우리에게 반대한 이들의 파멸을 원하거나, 무제한의 핵 전면전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악의 세력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8. 오늘날 우리에게는 현세의 문제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하나님과 관계된 문제에만 온전히 자신을 바치겠다는 사이비 영성이 아닌, 정치적 결단과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도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이 요구되고 있다. 저자는 도덕적 진리를 방기하고 수많은 인류가 무참히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을 더 이상 진지하게 도덕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으면서 그것을 현실적 권력관계로만 보는 후기 기독교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적 광기로 인해 전 세계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지느냐 아니면 진리와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우리의 신의를 바탕으로 끈기 있고 영웅적인 노고와 희생을 통해서 일치와 질서와 평화가 만발한 세계를 창조하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저자는 전향적이며 철저한 다자간 군비철폐 협상을 통해, 그리고 평화를 위한 인류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국제기구를 통해 이 일을 꾸준하고도 끈질기게 시행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9. 최근 북한의 핵 선제공격 선언과 정전협정파기 선언(물론 대화를 위한 레토릭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남한의 핵무장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비등해가는 한반도의 엄중한 상황에서, 인내와 화해와 평화의 정신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증오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적실한 예언의 소리로 들린다. 프로이트와 프롬이 말한 파괴의 본능 (Thanatos) 와 죽음애 (Necrophilia) 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와 ‘보수’교회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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