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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기행

2008년 비전케어 첫 캠프 참가기(몽골) -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by 서음인 2016. 6. 1.

2008년 5월 1 일 (목)


 드디어 비전케어(Vision Care) 에서 개최하는 제 38차 몽골 비전케어 아이캠프(Vision Care Eye Camp) 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안과학회 소식지에 매번 소식이 실릴 때마다 항상 한번쯤은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지만 마침 6월 아이캠프의 장소가 몽골이지 않은가! 평소 내 신앙의 스승이자 멘토로 존경하는 오 박쉬(몽골어로 선생님)의 사역지인 몽골을 한번 방문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던 나에게 이번 몽골 아이캠프야말로 일석이조의 좋은 기회일 듯 싶다. 아내에게 함께 가자고 이야기하니 흔쾌히 동의. 역시 결혼은 비젼이 같은 사람과 할 일이다.

 

연세친선병원 로비에서 아내와 함께


5월 29일 (목)


출국 3 주전 첫 준비모임 참석. 오전 진료 후 병원에서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 반갑게 맞이하는 아내와 만나 모임장소인 명동 유네스코회관의 비전케어 본부로 향했다. 며칠 전 부모님이 몽골사역기간동안 아이들을 기꺼이 맡아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격려까지 해 주셔서 마음이 가볍다. 새삼 부모님의 사랑이 깊고 크다는 것을 느낀다.

 

 모임에 참석하여 그간 전화로만 통화하던 담당 간사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뜻밖에 과거 레지던트 시절 강의를 듣기도 했던 가천의대 백교수님을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났다. 만약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동일한 비젼을 위해 헌신하고 기도했던 사람을 천국에서 만난다면, 혹은 오래전에 헤어진 후 한번도 보지 못한 누군가를 천국에서 다시 만난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이어지는 사역소개와 교육. 이제 약간씩 몽골행이 실감나기 시작한다.


6월 3일(수)

 

갑자가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출국을 보름 남짓 남겨놓은 상태에서 여권을 분실한 것이다. 눈앞이 캄캄해진다. 여러 가지 사정상 출국기한 내에 여권이 다시 나온다는 것이 매우 힘든 상황. 여기 저기 수소문하고 오후 내내 뛰어다니지만 상황이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마음이 답답하다.

 

6월 12일(목)


 출국 전 마지막 준비모임. 여권은 다행히 여러 분들이 도와주신 덕분에 잘 해결되어 오늘 모임에 오기 전 새로 발급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번 아이캠프는 나에게는 큰 부담이 없었다. 적어도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 비록 환경과 장소가 바뀌긴 하겠지만 진료와 수술은 내가 15년간 해온 일이 아닌가? 난 그냥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봉사하고 오겠다고 생각했을 뿐이고, 선교니 뭐니 하는 거창한 단어는 솔직히 남들 보기에 좋은 치장이었을 뿐 진심으로 마음속에 와 닿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상황이 만만치 않게 돌아가니 이 캠프가 내 생각과는 달리 혹시 '영적인' 사역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은근히 긴장되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진료를 위해 기다리는 수많은 몽골의 환자들


6월16일(월) - 6월17일(화) 오전 8시


아침에 출국준비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저녁6시 45분으로 예정되었던 출국 일정이 새벽2시로 연기되었단다. 갑자기 황당해진다. 아니 그러면 그곳에 도착하면 현지시간으로 새벽 네 시라는 이야긴데 잠은 어떻게 하며, 언제 준비해서 진료한다 말인가? 한편으로는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은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대단한 밥상(?)을 차려놓지 않으셨을까 하는 기대가 들기도 한다. 어쨌든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내일을 위해 미리 낮잠 좀 푹 자두는 것이리라. 


 자정쯤 인천공항 집결장소로 가보니 안과의사 네명을 포함해서 함께할 자원봉사자 20여 명과, 산더미 같은 짐 박스 30 여 개가 반긴다. 현지에 안과진료나 수술을 위한 기구가 전무하기 때문에 모든 장비와 소모품들을 우리 팀이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당일 출발하는 총 19 명의 인원 중 남자는 7 명, 그중 내가 두 번째로 어리다. 짐 부치는 일에 발벗고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 낑낑대며 짐을 부친 후, 우여곡절 끝에 결국 울란바타르행 비행기는 새벽 3시에 출발했다.

 

 세 시간의 비행 끝에 황량한 고비 사막을 거쳐 울란바타르에 도착하니 현지시간 새벽 5시. 통관절차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가지고 온 수술용 의약품이 통관심사에 걸린 것이다. 귀중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난감해진다. 일단 의약품은 몇 명이 남아 해결하기로 하고 공항을 빠져나오니 오, 전 박쉬 부부가 환한 얼굴로 맞아주신다. 정말 눈물이 날 만큼 반갑다.

 

 재회의 기쁨을 뒤로 하고 숙소를 향해 출발했다. 잠시 후 호텔에 도착해서 여정을 풀고 30분후 집합해 병원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호텔이 우리의 장급여관 수준보다도 못한 것 같다. 화장실 변기의 물은 내려가질 않고 수도에서는 녹물이 나온다. 하기야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병원에는 이미 환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 예정된 백내장 수술만 20건이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결국은 큰 일(?)을 치른 변기의 물을 내리는 데 실패한 채 진땀을 흘리며 급히 호텔 로비로 향했다.


연세친선병원의 아침예배 


6월17일(화) 오전 8시 - 밤


 다행히도 병원은 숙소에서 차로 5분 거리 정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에는 이미 우리 팀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 온 환자들로 가득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병원의 한,몽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드리는 아침예배에 참석했다. 평생을 미국에서 전문의로 일하시다가 미리 은퇴한 후 자원해서 여생을 몽골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몇몇 백발이 성성한 한국 老의료사역자들의 모습과, 그분들이 증거하시는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능력이 느껴지는 메시지가 인상 깊다.

 

 오전수술 담당인 나는 수술방에서 간호사들을 도와 수술현미경과 기계를 설치한 후 오전 열한 시쯤 39차 몽골아이캠프의 첫 수술에 임했다. 환자는 19 세 젊은 아가씨로 별로 수술하기에 어렵지 않은 백내장. 잠시 기도 후 수술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소 잘 보이던 수술현미경 시야가 흐리고, 자신 있던 손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수술자가 당황하니 수술은 더욱 더딜 수밖에 없고, 어서 빨리 끝내고 수술방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어찌어찌해서 평소 수술시간의 몇 배 걸려 무사히 첫 수술을 마치니 온 몸은 땀으로 흥건하다. 계속 헤메가며 몇 명 더 수술을 끝내니 오후 2시. 기운이 탁 풀리고 밥맛도 별로 없다.

 

 그래도 억지로 도시락을 우겨넣은 후 오후에는 외래진료에 임했다. 이번에는 피로와 졸음이 엄습한다. 하기야 밤새 제대로 자지도 못한 상태에서 오전 내내 긴장하고 수술했으니 피곤할 밖에.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허벅지를 꼬집어 졸음을 쫓아가며 겨우 오후진료를 마친 시간은 오후 여섯 시. 아침에 그렇게 고생했건만 슬슬 수술방 상황이 궁금해진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들어가 봤더니 오후수술담당 유 원장님 역시 고투 중이신 것 같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슬며시 밀려온다. 예의상 한마디를 던졌다. “힘드시면 저하고 손 바꾸시죠” 그랬더니 웬걸 바로 그러자고 하시는 게 아닌가. 아마 원장님도 많이 힘드셨나보다. 그래서 오전에 이어 뜻하지 않게 수술방에서 호기심의 댓가(?)를 단단히 치른 후 늦은 저녁을 먹고 호텔로 들어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바로 침대로 직행해서 최근 몇 년간 경험한 가장 깊고 달콤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백내장 수술

 

6월18일(수)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 아침 7시에 호텔식당에 모여 잠시 경건의 시간을 갖고, 빵과 계란으로 간단한 아침식사 후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하루 늦게 도착한 비전케어 대표 김동해 원장에게 어제의 힘들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 수술결과가 걱정된다고 했더니 이곳 캠프에서는 어려워도 모두 믿음으로 잘 된다면서 걱정하지 말란다. 아닌 게 아니라 어제 수술한 환자들을 진료해 보니 고생한 것에 비해 희한하게도 결과들이 좋다. 감사할 일이다.

 

 오늘도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힘든 하루를 마치고 식사 후 호텔로 가니 뜻밖에 오 박쉬 내외가 방문해 계시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오 박쉬가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면서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베푸시는 구원을 보라” 는 출애굽기 14장 13절 말씀을 인용하셨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난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깨닫기를 원하시는 진리가 바로 이거였구나! 나는 내가 가진 것을 누구에겐가 베풀겠다는 있는 자요 가진 자로서의 교만한 심령으로 이곳에 왔고, 그런 마음으로 이곳 몽골 땅에 서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몽골 땅에 오기 전과 도착해서 겪은 여러 어려움들은 그렇게도 교만한 나를 하나님이 그래도 사랑하사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겸손을 훈련시키시는 과정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니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선교란 내 의지 내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사랑 앞에 무릎 꿇고 겸손하게 동참하는 것이며, 선교자는 삼위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과 사랑을 바라보며 가진 것 없는 우리를 동참시켜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는 낮은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다. 이제야 내 눈을 덮었던 안개기 말끔히 사라지는 느낌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다.


환자 진료


 6월 19일(목)


 이번 캠프에는 몇 분의 연세 지긋한 자원봉사자들이 참가하셨다. 그분들의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분들이 가진 사랑의 크기 때문이다. 50-60년대의 절대빈곤 시대를 몸으로 겪은 그분들은 몽골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마치 자신의 형제나 이웃의 일처럼 안타까와 하셨고, 심지어는 사비를 들여 그들을 돕기도 하셨다. 그분들을 보면서 하나님은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 능력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가난과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보다, 감겼던 눈을 번쩍 뜨게 해줄 수 있는 신비한 의술을 가지고 있지만 이기적이고 냉랭한 가슴을 가진 사람보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겸손한 사랑과 따스한 인간애를 가진 사람을 통해 일하시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오늘은 일과가 끝난 후 스승이신 오 박쉬 부부의 사역현장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오후 다섯 시 반쯤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함께 사역하시는 교회로 향했다. 저녁에 우리나라의 중고등부 연령대에 해당하는 아이들의 예배가 있다고 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허름한 교회, 그리고 콘테이너 박스로 지은 사무실 등 부족할 것 없는 환경에서 신앙생활 하는 나에게는 한마디로 열악해 보인다. 그래도 자기 소유인 단독건물을 교회로 쓸 수 있어 행복한 편이라는 선교사님의 설명에 할 말을 잃었다.

 

 잠시 나를 소개하는 시간이 되어 앞으로 나가 “저는 한국에서 여기 계시는 오 선생님에게 여러분 나이 또래에 지금 여러분처럼 성경을 배운 사람입니다” 라고 소개하니 아이들이 와 하고 좋아한다. 그 후로도 몇 마디 말을 했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고등부 시절 오 박쉬께 성경을 배우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 말씀의 오묘함을 깨달았듯이, 지금 여기에 있는 저 영혼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있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예배 후 오 박쉬 부부와 동역하시는 목사님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섬기는 남매와 함께 저녁식사 시간을 가지면서 몽골의 전통음악을 감상했다. 그 악기의 깊고 풍부한 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새삼 몽골 민족이 가진 문화적, 역사적 저력이 느껴진다. 하나님이 몽골민족을 마지막 때에 세계선교를 위해 쓰시기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오 박쉬의 비젼이 실현되기를 위해 기도했다.


몽골 전통예술 공연


 6월20일(금)


 오늘도 수술실에서 안타까운 상황을 목도해야만 했다. 환자는 진행된 선천성백내장을 가진 3세 어린이. 백내장을 제거하면 어느 정도 시력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수술을 결정했고, 다행히 수술이 잘 진행되어 병든 수정체가 안전하게 제거되었다. 시력회복을 위해 인공수정체를 넣으려는 찰나 뭔가 이상하다. 자세히 보니 오래된 미숙아 망막증으로 인해 망막이 심하게 손상되어 시력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조기에 발견하여 적절한 치료를 하였더라면 시력을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곳에서는 이렇게 너무 늦게 발견되어 치료시기를 놓치거나 한국이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환자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한정된 인력과 시간, 그리고 장비밖에 가지지 못한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사실 비전케어와 같은 초교파 의료사역단체의 경우 개인이나 기업의 후원은 꽤 있지만, 개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들었다. 아마도 선교를 하더라도 자기교회나 자기단체의 이름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을 선호하는 우리의 풍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그러나 의료와 같이 전문적인 인원과 장비가 필요한 분야를 개교회 단위에서 사역하는 경우 남들이 보기에 어떨는지는 몰라도 실제 효율적인 사역이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오히려 개교회나 교파를 초월한 전문인 사역단체가 훨씬 실제적이고 효과적으로 현지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환자 100명분의 백내장 소모품비에 해당하는 1천만원을 선뜻 후원한 Y교회가 참 대단하게 느껴지고 좀 부럽기도 하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기에 되도록 많은 환자를 수술하기 위해서 무리해서 수술을 잡은 결과 저녁 9시 20분이 되도록 오늘 예정인 환자 일곱 명을 수술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은 예정에는 없지만 내일 오전에 수술해 주기로 하고 일단 수술을 끝냈다. 그후 늦은 저녁을 먹고 호텔방에 도착하니 오 박쉬 내외가 또 방문하여 계셨고 우리는 대화와 기도로 한밤중까지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마지막 날 수술을 마치고!


6월21일 (토)


 오늘은 일정의 마지막 날이다. 일찍 일어나 그동안 수술한 환자들을 전부 진료한 후 짐을 정리하고 연세친선병원 안과 개소식에 참여했다. 나에게도 한마디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이 아마도 이번 몽골 사역의 결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몽골 분들에게 봉사하겠다고 왔지만, 실제 내가 몽골 분들에게 준 미약한 도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어서 갑니다. 이런 귀한 배움의 기회를 주신 몽골의 여러 환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몽골을 위해서 늘 기도하며 반드시 다시 오겠습니다.”

 

연세친선병원 안과 개소식


7월4일(금) - 후기


 10월 중순에 서남 아시아의 두 도시에서 열리는 비젼케어 아이캠프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이번에도 아내와 함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단 한 번의 안과진료를 위해 수백 Km 을 마다 않고 달려왔던 수많은 영혼들의 간절한 눈빛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세계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당연시하는 아주 작은 의료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치료의 손길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너무도 쉽게 접할 수있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그 기쁨을 누릴 기회를 얻지 못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르지만 내가 그들을 본 이상 내 삶이 이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는 이제 결코 몽골의 폭동이나 파키스탄의 테러, 방글라데시의 홍수, 아프리카의 기근에 대한 뉴스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정말 그 영혼들을 위해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내가 내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미약한 힘이나마 그들을 돕기 위해 보태고 싶다. 그 첫 번째 걸음으로 나와 내 아내는 올해 휴가를 서남 아시아의 영혼들을 섬기기 위해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제 그곳에서 내 눈으로 목도하게 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기대하면 벌써 마음이 설레인다. 앞으로 내 인생이 기독교 저술가 폴 트루니에 의 말처럼 하나님과 함께하는 모험의 여정이 되기를!!


39차 몽골캠프 환자 및 봉사자들이 한 컷. 882명 진료에 128건의 수술을 시행하였습니다



(200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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