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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기독교/선교

세계화에 맞서는 기독교적 증언 (리처드 보캄 지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by 서음인 2016. 6. 2.

1.영국의 신약학자로 요한계시록에 대한 연구서와 몇 권의 주석서들로 만난 바 있는 저자는 성경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특수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라는 보편이 이루어져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그 이야기에 비추어 세상의 모든 개별적인 이야기가 해석되는 이야기 중의 이야기, 소위 메타내러티브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이야기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여받게 되는데 이러한 그들의 참여와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선교라고 강조한다. 즉 성경이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선교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교적 백성으로 규정될 수 있다. 


2. 하나님의 선교에 관한 이야기인 성경의 내러티브가 특수에서 보편으로 이동하는 세 가지 역사적 형태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다윗을 불러내신 하나님의 선택으로 시작되며 그 각각의 이동궤적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의 각 측면을 드러낸다. 세 가지 궤적은 (1) 아브라함에서 땅의 모든 족속에 이르는 복의 궤적으로 하나님은 이 궤적을 통해 아브라함의 복이 모든 족속에게 흘러넘치기를 원하신다. (2) 이스라엘에서 열방에 이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궤적으로 하나님은 이 궤적을 통해 자신을 모든 열방들이 인정해야 하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드러내신다. (3) 시온에 세워진 다윗의 왕권이 땅 끝까지 이르는 하나님 나라 통치 확장의 궤적으로 이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권이 땅끝까지 확산된다. (4) 마지막으로 가장 작고 연약한 자들을 통해 모두에게로 이르는 궤적 으로 이 궤적을 통해 십자가에 달린 연약하고 비천한 예수가 모든 사람에게로 전파되며 따라서 교회는 그가 부름받은 세상의 빈곤과 불의에 무관심할 수 없다. 선교에 나선 교회는 자신의 시대에 이 궤적의 흐름이 확장되는 특수에서 보편으로의 이동을 구현하도록 부름받는다. 


3. 이러한 성경적 내러티브는 오늘날에도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차원 에서 특수에서 보편으로 진행되는 흐름을 지속한다. (1) 성경적 내러티브의 시간적 이동은 창조에서 종말론적 미래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행되며 이러한 시간의 이동 안에서 선교는 특수한 과거에서 보편적인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움직임이 된다. (2) 성경적 내러티브의 공간적 이동은 한 곳에서 모든 곳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예루살렘에서 땅끝으로 진행되며 따라서 선교란 늘 새로운 지평을 향한 움직임이 된다. (3) 이러한 시공간의 이동은 언제나 사람들의 움직임 곧 개인에게서 개인으로 사람들에게서 사람들에로의 움직임이며, 따라서 사회적으로 선교는 언제나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움직임 곧 늘 새로운 사람들과의 움직임이다. 신약성경은 오늘날에도 교회를 이러한 흐름 한 가운데 위치시켜 우리 시대의 교회에 선교적 정체성을 부여하며, 온 세상과 세계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지금 펼쳐지고 있으며 우리가 그 일에 관여하고 있음을 늘 일깨운다.       


4. 중심과 주변이라는 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선교는 구심적 이동(주변에서 중심으로) 과 원심적 이동(중심에서 주변으로)이라는 두 방향을 통해 진행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루살렘과 성전이라는 지리적 ‘중심’을 장소나 건물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이해하는 신약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면 중심과 주변이라는 공간적 이미지는 실제 공간과의 지리적 관련성을 잃게 되며, 따라서 선교는 중심(선교지)에서 주변(피선교지) 으로의 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일어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지리적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은유로 이해하는 요한복음을 따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새로운 성전이자,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는 ‘중심’이며 따라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끄는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선교란 곧 하나님의 선교라고 말할 수 있다.


5.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메타내러티브인 경제적 세계화 혹은 전지구적 지본주의는 자유시장경제와 이에 수반되는 문화, 소비자 중심주의와 개인주의, 미국과 여러 유럽국가들에 기반을 둔 다국적 기업들의 지배가  세계로 확장되는 것이며, 과거의 정치적 제국주의와 구별된 경제적 제국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이에 맞서는 현대의 사조인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종류의 메타내러티브를 불신할 뿐 아니라 보편주의와 통합에 반대하여 다양성과 이질성을 지지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현대의 상황 가운데 그들에게 주어진 선교의 과제를 창조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성경의 이야기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메타내러티브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맞서면서도 차이를 억압함으로서 힘과 지배를 꿈꾸는 모더니즘의 메타내러티브와도 구별되는 성경적 메타내러티브의 몇몇 독특한 특징들을 기억해야 한다.       


(1) 성경의 내러티브는 자연과 인간 역사라는 두 실재가 원래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인간의 진보를 위해 합리적으로 정복될 수 있다고 믿는 모더니즘의 메타내러티브와는 달리 역사를 하나님의 자유와 목적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며,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자신이 계시하시는 한도 내에서만 알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선교란 인간의 정복이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프로젝트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며, 예정된 패턴을 역사에 강제하는 것이 아니고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것에 문을 여는 일이다. 우리는 근대 선교가 흔히 그래왔듯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모더니즘의 메타내러티브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수행하려 해서는 안된다.                        


(2) 기독교 메타내러티브는 이윤추구를 지고의 목표로 삼는 세계화의 가치들에 맞서야 하며, 그러한 과제는 자신이 지배력을 구사하는 도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섬김과 십자가의 길을 갈 때에만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교회는 성경적 내러티브는 가장 낮은 자들을 통해서만 모두에게 다가가는 운동이며 세계의 가난한 자들과 국제적으로 연대하지 않는 교회 선교는 타당성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3) 성경에는 치밀하게 구성된 단일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양한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모순되는 많은 내러티브들과 非내러티브들이 섞여 있으며, 이러한 성경 내러티브의 다양성은 그 자체로 나름대로의 완전함이 있는 개별적인 특수들을 쉽게 보편을 위해 억누르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의 메타내러티브는 보편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코 보편을 위해 특수를 억압하거나 말살하지 않는다. 특수성과 다양성이야말로 보편적인 성경내러티브로 나아가는 첩경이다.

                                                                                                

(4) 교회는 보편적 진리를 거부하고 권위주의적이거나 억압적인 모든 메타내러티브에 반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 대해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주장하되 진리가 자신들만의 소유라는 주장을 확정적이고 폐쇄적인 것으로 발전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교회가 자신들의 진리를 드러내는 방식은 강제력의 방식이 아닌 증언이며, 섬김과 고난의 제자도라는 십자가의 도는 기독교 증언의 내용일 뿐 아니라 그 증언의 가장 적절한 형식이기도 하다.     


6. 결국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수치와 고난, 겸손과 섬김의 십자가야말로 참된 기독교 증언의 형식과 내용이여야 하며, 힘과 영광 그리고 권능의 하나님을 가르치는 ‘영광의 신학’은 궁극적으로는 참된 증거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며 (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한다 (Crux probat omnia)” 라는 루터의 고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선교의 영역에서도 언제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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