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 기독교/역사

복음주의 세계확산 -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브라이언 스탠리 지음, CLC 펴냄)

by 서음인 2016. 6. 2.

1.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최근까지 주로 영미권을 중심으로 발흥했던 복음주의 신앙이 어떻게 전 세계적 차원의 운동으로 발전되고 확산되었는지를 주요 인물들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엮어 낸 흥미로운 역사서다.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있는 빌리 그래함이나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프란시스 쉐퍼, 코르넬리우스 반 틸, C.S. 루이스, 레슬리 뉴비긴 등은 20세기 복음주의 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며, 그 중 스토트루이스, 뉴비긴과 같은 저자들은 지금도 내게 꾸준히 가르침과 영감을 주는 신앙의 스승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20세기 영미권 복음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일 뿐 아니라, 그 흐름의 자장 안에서 형성된 내 신앙의 심층을 탐사하는 여행이기도 했다.  



2. 저자에 의하면 2차 세계대전 후의 영미권 복음주의는 ① 19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복음주의의 지도자들이 분리주의적 근본주의자나 주류 기독교의 자유주의적 신앙과 구별되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시도한 시기 ② 긴 60년대 (long 1960's 1958-1974) 라 불리는, 이러한 노력이 어느 정도 열매를 맺어 복음주의 혹은 新복음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합의에 도달한 시기 ③ 1974년 이후 현재까지 복음주의의 양적 지리적 성장과 함께 다양성과 다각화가 진행되면서 복음주의자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시기로 나뉠 수 있다. 


(1) 미국에서 (신)복음주의는 1947년에 나온 칼 헨리의 책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을 시작으로 전미 복음주의협회 (NAE) 의 창설, 풀러 신학교의 설립, 빌리 그래함의 활약,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의 발간 등을 통해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학문적이고 평화적이며 포용적일 뿐 아니라, 지조 있는 고립보다는 흔들림 없는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열심을 그 특징으로 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 미국과는 달리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역사적 주류 교파를 떠나지 않았던 영국의 (신)복음주의는 이 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설계자였던 성공회 소속 존 스토트제임스 패커, 개혁파 감리교도로 청교도적 부흥의 주역이었던 마틴 로이드 존스 등의 활약으로 신학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지적으로는 세련된 이미지를 가지는 집단으로 거듭나는 데 성공했다.



3. 미국의 복음주의는 자신의 계몽주의적 뿌리와 근본주의 논쟁의 영향으로 ‘정통’ 기독교의 진리를 조직적이고 철학적으로 변증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1) 고전적 개혁파 전통이 아닌 어떠한 신앙도 평화적 대화가 아닌 싸워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했던 전제주의적 변증의 대가 코르넬리우스 반 틸 (2) 유신론의 합리성과 성경 계시의 명제적 특성을 강조하며 기독교야말로 다른 어떤 전제보다도 인간 이성의 정밀한 탐구를 잘 견뎌내는 체계라고 주장한 칼 헨리 (3) 성경을 기독교 신자를 가르치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무오한 도구라고 주장하면서 세대주의 신학과 분리주의적 정신구조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던 에드워드 카넬 (4) 변증학의 과제는 자유주의 기독교와의 싸움이 아니고 20세기 세속 문화의 철학적 가정들과 직접 대면해서 그들과 씨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프란시스 쉐퍼 (5) 기독교 유신론 신앙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교육받은 지성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설득력있는 응답을 제시한 기독교 철학자 엘빈 플린팅가 등이 이 전통에 속한다. 


이에 비해 영국의 복음주의는 합리적 증거가 아닌 성령의 내적 증언이 성경의 진리를 확증시킬 것이라는 가정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이는 변증학에서 가장 성공을 이룬 작품 (기독교의 기본진리) 의 의도가 변증이 아닌 전도였고, 그 초점은 기독론이었으며, 그 저자가 신학자가 아닌 강해 설교자 (존 스토트) 였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한 (6) 그리스도인들은 현대의 합리성이라는 전제가 아닌 복음의 관점에서 시작하여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을 설명하고 이 세계관에 도전해야 하며, 성경의 진리성은 논리적 변증이 아닌 성경 메시지를 구현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고 강조하는 레슬리 뉴비긴 (7) 논리만으로는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 수 없으며 상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탐구자가 성경 내러티브가 드러내는 진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C.S. 루이스와 같이 복음주의 전통에 속하지 않은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들도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복음주의자들에게 탁월한 지적 통찰을 제공했다.


4. 지적 노력을 억압하는 공격적 유형의 근본주의가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복음주의 성서학 분야가 주류 지성사회와 고립된 채 신학교 내에 국한되어 있었던 미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1950년대 이후 복음주의에 헌신한 학자들이 주요 연구 중심 대학의 신학과 성서학 분야에서 상당한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 결과 조지 래드, F.F.브루스, 톰 라이트, 하워드 마샬과 같은 탁월한 성서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성서비평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던 미국의 복음주의권에도 ‘신앙에 근거한 비평’이라는 영국 복음주의 성서학자들의 신념이 점차 수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 무오와 관련된 다양한 논쟁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성경의 권위와 역사비평의 수용 여부를 둘러싼 합의를 만들어내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크리스테르 스텐달이나 폴 킹 쥬이트, 스탠리 그랜츠 등에 의해 주도된 여성 안수나 동성애와 관련된 해석학적 논쟁이 기독교 내에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가르는 새로운 상징적 분리선으로 등장하고 있다.


5. 1974년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 국제대회는 사무엘 에스코바르네 빠디야 같이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 복음주의자들의 급진적인 주장을 전통적 복음전도의 중요성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존 스토트의 리더십에 힘입어, 그동안 복음주의 선교에서 주변적인 사안으로 여겨지던 사회정의/참여를 중심 이슈로 부각시키면서 복음 전도와 사회적 관심을 동시에 강조하는 총체적 선교의 중요성을 천명한 로잔 언약을 채택했으며, 이는 향후 복음주의 운동의 문화적 정체성과 선교적 지향점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통적인 전도와 선교의 영역에서 후퇴하여 원조나 개발 혹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자신들의 역량을 집중한 미국의 주류 교단들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영적 갱신과 부흥 그리고 복음전도와 세계선교에 헌신한 복음주의 운동은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를 포괄하는 지리적 확장과 폭발적인 양적 부흥을 경험했으며, 그중에서도 특히 오순절 유형의 교회 혹은 은사주의 갱신을 통해 오순절화된 교회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이렇듯 다양하고 새로운 흐름들은 복음주의 운동에 통전적인 시각과 새로운 영적 활력을 제공했지만, 복음주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6. 저자는 1940년대 미국의 (신)복음주의자는 지성을 경멸하는 근본주의자와 스스로를 구별짓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변방집단에 불과했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멸시받는 소수가 아니며 개신교의 중심 무대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지리적 문화적 확산은 이 운동의 신학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을 점점 어렵게 만들고 있으며,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경계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제에 직면해 있다. 저자는 우리 시대 복음주의의 미래는 브라이언 맥클라렌으로 대표되는 이머징 교회 운동이나 스탠리 그랜츠톰 라이트가 대표하는 탈보수주의적 기독교가 아닌 “남반구 안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건강과 부를 약속하는 조악한 신유 신학에 십자가를 종속시키는 일종의 종교적 유물론”이 “성경적 종말론 위에 올바른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하느냐의 여부” 에 달려 있으며, 오늘날 복음의 온전성을 지키기 위한 전투는 “북미의 신학교 강의실이 아닌 제 3세계의 빈민가와 슬럼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7.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른 몇 가지 단상들이 있다. 


(1) 이 책이 잘 그려내고 있는 풍성한 복음주의의 유산을 “근본주의”라는 말로 한꺼번에 매도하는 것이 무지하고 폭력적인 일이듯, ‘보수 정통’ 복음주의에 속하지 않은 다양한 기독교의 전통과 흐름들을 “자유주의”라는 한 단어로 싸잡아 정죄하는 것 역시 무식한 행위요 심각한 교만이다. 만약 복음주의자라는 말이 나와 다른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그들을 기꺼이 지옥으로 보내는 것을 통해서만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습속을 지닌 사람을 의미한다면 나는 그런 ‘복음주의자’의 무리에 속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2) 이 책은 토종 한국인인 내가 가진 ‘복음주의’ 신앙의 내용이 적어도 지금까지는 영미 복음주의의 복사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연 한국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복음주의’ 를 영원히  바빙크와 워필드와 메이첸의 꽃밭에서 딴 꽃들로 만든 꽃다발로만 채워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일까? 혹시 그 꽃다발이 스토트와 뉴비긴과 톰 라이트에게서 취한 것이라면 그것은 좀 더 참을만한 운명이 될까? 


(3)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오늘날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WCC도 동성애도 아닌 “건강과 부를 약속하는 조악한 신유 신학에 십자가를 종속시키는 일종의 종교적 유물론” 일 것이다. 문제는 그 허접한 유사복음이 ‘건강과 부’ 의 결핍에 허덕이는 빈민가와 슬럼이 아닌, 이 모든 것들을 넘치도록 소유하고도 더 가지기를 원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대형교회의 강단에서 더 크게 울려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한국교회의 미래에 희망은 있는 것일까?





댓글